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계형(季亨), 호는 회와(晦窩). 윤영(尹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지선(尹止善)이다. 아버지는 경주부윤 윤이(尹理)이며, 어머니는 이의윤(李義胤)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진사를 거쳐, 1708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주서(注書)에 초임되었다. 이 때 글씨를 빨리 써서 비주서(飛注書)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 뒤 지평(持平) · 정언 등을 역임하고, 1716년 문학 · 필선 · 헌납 · 집의를 거쳐 이듬해 경상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보덕(輔德)을 지냈다.
1720년 승지 · 병조참의 · 우부승지를 거쳐 1721년(경종 1) 충청도관찰사로 재직 중에 왕명을 어겨 효수형을 받게 된 박세명(朴世明)을 두둔한 죄로 파직, 국문(鞫問)을 받았으나, 곧 석방되어 동지 겸 주청부사(冬至兼奏請副使)로 청나라에 갔다.
다음 해 청나라에 가서 경종의 병약함을 발설했다는 죄목으로 파직, 갑산에 위리안치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 나와 승지가 되고, 이어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간으로 재직 중 윤심형(尹心衡)의 논척(論斥)을 받고 영월부사로 나갔다가 곧 병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안동부사를 거쳐 1729년 예조와 병조의 참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등을 역임하고 다음 해 함경도관찰사, 1732년 한성부우윤 · 경상도관찰사 · 도승지 · 평안도관찰사 · 한성부판윤을 거쳐 형조판서 · 공조판서 · 호조판서 · 대사헌을 지냈다. 1741년(영조 17) 좌참찬을 받아 아경(亞卿)의 지위에 올랐다.
1743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1746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있을 때, 유생 60여 명과 연명 상소로 소론 박문수(朴文秀) 등이 탕평론을 벌이자 신임사화에 관련된 소론들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한 때 삭직되었다.
이 해에 판돈녕부사로 치사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만년에 노론으로서 분란을 일으켰으나, 경사에 밝고 글씨를 잘 썼다. 글씨로는 「영상윤인경비(領相尹仁鏡碑)」와 「엄흥도묘갈(嚴興道墓碣)」 등이 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