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 좌참찬 김점(金漸)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영우(金靈雨)이고, 아버지는 김현(金俔)이며, 어머니는 전윤서(全允序)의 딸 전의인이다.
1528년 이황(李滉)과 함께 사마시에 주1, 1537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주2 검열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8월에 윤원형(尹元衡)이 왕의 명이라 하여 양사(兩司)를 협박,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김광준(金光準)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윤임 등을 대역으로 논하려 하여 집의 송희규(宋希奎), 지평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우(朴光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기(李芑) · 윤원형 등의 청에 의하여 남해로 유배되었고, 1565년에 감형되어 단양으로 주3
선조 초에 이준경(李浚慶)의 청으로 풀려나와 기대승(奇大升)의 주장으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 · 응교 · 직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주 오산사(梧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주4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