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난상 ()

병산집
병산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응교, 직제학,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계응(季應)
병산(缾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7년(중종 2)
사망 연도
1570년(선조 3)
본관
청도(淸道)
주요 관직
대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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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응교, 직제학, 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 좌참찬 김점(金漸)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영우(金靈雨)이고, 아버지는 김현(金俔)이며, 어머니는 전윤서(全允序)의 딸 전의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 이황(李滉)과 함께 사마시에 주1, 1537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주2 검열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8월에 윤원형(尹元衡)이 왕의 명이라 하여 양사(兩司)를 협박, 윤임(尹任) · 유관(柳灌) · 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김광준(金光準)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윤임 등을 대역으로 논하려 하여 집의 송희규(宋希奎), 지평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우(朴光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기(李芑) · 윤원형 등의 청에 의하여 남해로 유배되었고, 1565년에 감형되어 단양으로 주3

선조 초에 이준경(李浚慶)의 청으로 풀려나와 기대승(奇大升)의 주장으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 · 응교 · 직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주 오산사(梧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주4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기사전문록(己巳傳聞錄)』
주석
주1

사마시 급제 : 『가정7년무자2월24일생원진사방목(嘉靖七年戊子二月二十四日生員進士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174])

주2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3

단양 이배 : 『명종실록』 31권, 1565년(명종 20) 11월 30일. "평안도 변방의 분란 조짐으로 이양 등을 내지로 이배 시킬 것을 전교하다"

주4

김난상 저술 : 『병산선생유집(甁山先生遺集)』(국립중앙도서관 3648)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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