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시대 한성부좌윤,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문학가.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왜란 중 문안사(問安使) 등 대명 외교를 맡았으며 세자의 분조(分朝: 임란 당시 세자를 중심으로 한 임시 조정)에도 따라가 활약하였다. 그 뒤 병조참의·황해감사·도승지 등을 지내고, 1609년(광해군 1) 성절사 겸 사은사로 세 번째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다가 왕이 불러 남원부사로 나갔다.
그 뒤 한성부좌윤·대사간 등을 지냈으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유응경(柳應泂)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역률(逆律)로 다스려져 아들 유약(柳瀹)과 함께 사형되었다. 서인들이 중북파(中北派)라 부르며 끝내 반대 세력으로 몰아 죽인 것이었다. 이 때 관작의 추탈은 물론 임진왜란의 공으로 봉해진 영양군(瀛陽君)의 봉호도 삭탈되었다. 정조 때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또는 외교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전서(篆書)·예서·해서·초서에 모두 뛰어났다. 유몽인의 청명(淸名)을 기려, 전라도 유생들이 문청(文淸)이라는 사시(私諡: 개인의 시호를 국가에서가 아닌 사적인 방법으로 내림.)를 올리고 운곡사(雲谷祠)에 봉향하였다.
신원된 뒤에 나라에서도 다시 의정(義貞)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운곡사를 공인하였다. 고산(高山)의 삼현영당(三賢影堂)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야담을 집대성한 『어우야담』과 시문집 『어우집』이 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어우당집(於于堂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조야집요(朝野輯要)』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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