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는 한자로 창작된 정형시이다. 고체시와 악부와 달리 엄격한 형식과 규칙이 요구되는 근체시는 당나라 때 완성됐다. 한시는 고립어로서 단음절어인 한자의 특성에 따라 자수·구수와 평측·압운 등의 규칙을 지켜 창작된다. 자수는 5언·7언, 구수는 4구·8구가 일반적이다. 대체로 4구는 절구, 8구는 율시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한시 창작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역으로 당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그 수준이 뛰어났으며 고려·조선으로 이어졌다. 언어로서의 중국어에 익숙지 않은 탓에 한국인이 지은 시는 개념·정신의 시가 될 수밖에 없는 특성이 있다.
한시란, 글자 그대로 말하면 한자로 기록된 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것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자문화권에서 한자로 기록한 시까지를 포함하여 한시라고 한다. 한편, 특정시대의 시를 지칭하는 뜻으로서 한대(漢代)의 시를 한시라고도 하지만 이렇게 쓰이는 일은 극히 드물다.
한시는 오언절구 · 칠언율시 등과 같은 형식과 평측(平仄) · 압운(押韻)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이 형식과 규칙은 고립어(孤立語)로서 단음절어(單音節語)인 한자의 특성에 알맞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기원은 중국의 경우에도 정확히 밝혀내기 어려우며, 우리나라에서도 정확히 언제 한시가 도입되어 창작되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현전하고 있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또는 「유수장우중문시(遺隋將于仲文詩」]가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한시는 자수(字數) · 구수(句數)의 다소, 압운의 유무, 운자(韻字)의 위치 등을 기준으로 분류된다. 매구(每句)의 자수는 5언 · 7언이 가장 많고 4언 · 6언도 있다. 구수는 4구 · 8구 및 그 밖의 것으로 크게 나뉘며, 4구의 대부분은 절구(絶句), 8구의 대부분은 율시(律詩)라고 한다. 압운에서 운자는 구말(句末)에 위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고대의 시 가운데에는 구수(句首)나 구중(句中)에 압운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장편시에는 도중에 운을 바꾸는 환운(換韻)도 있다.
①고시(古詩): 고체 또는 고풍(古風)이라고도 한다. 이는 근체시(近體詩)에 대한 상대칭으로 쓰인 것으로, 당대(唐代)에 근체시가 완성되면서부터 이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으로 고시라는 이름이 불리게 되었다.
고시는 대개 두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근체시 성립 이전, 즉 수대(隋代) 이전의 시를 말한다. 광의로는 『시경』 · 『초사(楚辭)』까지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태고의 가요에서부터 양한(兩漢), 위 · 진 · 남북조의 악부 가행(歌行) 등을 지칭한다. 둘째는 근체시 성립 이후의 근체시 규격에 부합되지 않는 시를 말한다.
그러므로 고체시의 체재는 근체시와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첫째, 절구와 같은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구법(句法)이 없다. 둘째, 율시처럼 연(聯)의 구성이나 대구의 구속이 없다. 셋째, 율시 · 절구처럼 구수의 규정이 없다. 1구의 자수도 일정함을 요하지 않으므로 5언 · 7언 · 4언 · 6언 등이 있으며, 다만 5언 · 7언이 주가 되고 있을 뿐이다. 넷째, 여러 가지 방식의 압운은 있지만 엄격한 법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고시의 대표적인 것이 오언고시와 칠언고시이다. 오언고시는 당 이전의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이 시체는 한 구의 다섯 자를 2 · 3의 격조로 엮는 것이 정식이다. 오언고시는 전한시대에 그 정형이 성립되었고 건안시대(建安時代)에 대성하였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보낸 「태평송(太平頌)」이 문헌에 보이는 최초의 것이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도 시대적으로 근체시가 성립되기 이전의 것이며, 그 염법(廉法)에 있어서도 근체시의 규격에 맞지 않으므로, 이 작품도 오언고시라고 할 수 있다.
칠언고시는 육조(六朝) 말기에 본격적인 형식을 갖추게 되는데, 한 구의 일곱 자를 4 · 3의 격조로 엮는 것이 정식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오언고시보다 늦게 나타나 원효(元曉)가 지었다고 하는 ‘막생혜기사야고 막사혜기생야고(莫生兮其死也苦 莫死兮其生也苦)’라든지 수로부인(水路夫人)의 설화에 나오는 「해가(海歌)」등에서 그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다.
② 악부(樂府): 원래 악부란 악가를 관장하던 관청의 명칭이다. 악부에서 민요를 채집하고 새로운 노래를 제정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채집, 보존한 악장(樂章)이나 가사(歌辭) 또는 그 모작(模作)들을 통틀어 악부시(樂府詩) 또는 악부라 하였다. 이들은 모두 관현(管絃)에 올려 노래로 부를 수 있었기 때문에 뒷날에 협률(協律)된 시를 악부라 하였다.
한나라 무제 때에 이르러서 악부는 악부관서(樂府官署)에서 협률된 시를 지칭하게 되었으나, 건안 이후에는 모의작이 성행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음악에 넣을 수 없었으므로 이를 신악부(新樂府)라 하였다. 그러므로 악부라 할 때에는 한대의 악부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 뒤로 시인들은 다만 고악부(古樂府)의 제목을 따서 장단구(長短句)를 지었을 뿐, 노래로 불리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의 악부는 처음부터 노래로 부르기 위하여 제작한 것이 아니다. 이제현(李齊賢)의 「소악부(小樂府)」, 『고려사』 악지(樂志)의 속악(俗樂), 이색(李穡) 등 고려 말 문인들의 문집에 실린 가(歌) · 행(行) · 음(吟) · 영(呤) · 곡(曲) 등의 작품, 신위(申緯)의 「소악부」, 김종직(金宗直)의 「동도악부(東都樂府)」, 심광세(沈光世)의 「해동악부(海東樂府)」, 신광수(申光洙)의 「관서악부(關西樂府)」, 윤달선(尹達善)의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 등이 있으나 그 성격이 같은 것은 아니다.
③ 근체시(近體詩): 고체시에 대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를 말하며 ‘금체시(今體詩)’라고도 한다. 고체시와는 달리 운율, 즉 각 시구를 구성하는 음절의 억양 · 장단의 배열법이 일정한 규칙의 제한을 받는다. 율시 · 배율(排律) · 절구가 이에 속하며 각각 5언과 7언의 구별이 있다. 근체시는 당대에 그 형식이 완성되었다.
율시는 1편이 4운 8구로 된 것으로 5언 · 7언의 구별이 있다. 대우(對偶) · 성운(聲韻) · 자수 · 구수 등에 모두 엄격한 규정이 있다. 두 구절을 묶어 일련(一聯)이라고 하고, 수련(首聯) · 함련(頷聯) · 경련(頸聯) · 미련(尾聯)으로 구성된다.
이 때 함련과 경련은 반드시 대어(對語)를 써서 연구(聯句)를 이루어야 한다. 압운은 오언율시에는 제2 · 4 · 6 · 8구에, 칠언율시에는 제1 · 2 · 4 · 6 · 8구에 각각 각운(脚韻)을 붙여야 한다.
배율의 시체는 6연, 즉 12구로 한 편을 이루며, 한 구는 5언이 정격이나 7언도 있다. 평측과 압운은 율시의 그것과 비슷하나 6연을 모두 대어연구(對語聯句)로 하는 것이 원칙이다.
절구는 4구로써 완결되는 시형으로, 오언절구와 칠언절구가 있다. 4구가 기승전결로 구성되며, 1 · 2구는 산(散)이나 3 · 4구는 대(對)가 되어야 한다. 압운은 오언절구에는 제2 · 4의 구말(句末)에, 칠언절구에는 제1 · 2 · 4의 구말에 위치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반적으로 7언이 5언보다 우세하며, 7언 중에서도 율시가 우세하다.
우리나라에 한시가 전래된 시기를 정확히 밝히기란 불가능하거니와, 늦어도 서기전 2세기경에는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추정을 따른다면, 한시가 민족의 문학으로 수용, 향유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고조선시대 여옥(麗玉)의 작으로 알려지고 있는 「공후인(箜篌引)」(公無渡河歌)이나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 수로왕(首露王)의 강림설화(降臨說話) 속에 곁들여 전하는 「구지가(龜旨歌)」 등의 고대가요가 사언사구체의 한시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들은 모두 후대에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며 원가(原歌)는 실전(失傳)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공후인」은 출전문헌인 진(晉)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와 명나라 서사증(徐師曾)의 『문체명변(文體明辯)』에 따르면, 그 국적조차도 불투명한 형편이다. 다만,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주었다는 「여수장우중문시」(오언사구), 고구려의 중 정법사(定法師)가 자신을 외로운 돌에 비유하여 읊었다는 「영고석(詠孤石)」(오언팔구), 고구려인이 지은 것으로만 알려져 있는 「인삼찬(人蔘讚)」(사언사구)이 고구려시대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중국대륙과 연접한 고구려가 한자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신라보다 앞섰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통일신라와 고려가 남겨준 자료 이외에는 접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신라는 621년(진평왕 43)부터 정식으로 당나라와 국교를 가지게 되었는데, 640년(선덕여왕 9)에 당나라 태종이 태학(太學)을 증설하고 외국의 자제에게 유학을 허락함에 따라, 고구려 · 백제와 더불어 신라에서도 입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한자문화를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게 되는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의 일이다.
신라는 삼국통일로 우선 지리적으로 중국을 쉽게 내왕하게 되었으며, 삼국통일의 성취도 당나라와의 합작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입당유학의 편의도 최대한으로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50년(진덕여왕 4)에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太平頌, 오언고시)을 비단에 짜서 당나라에 바친 사실도 신라의 삼국통일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에 따라 821년(헌덕왕 13)에 처음으로 김운경(金雲卿)이 빈공(賓貢)으로 급제한 이래 많은 합격자를 내었다.
중국측의 문헌에 산재해 있는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면, 김가기(金可紀)가 뒤이어 빈공진사에 급제하고 있으며 845년(문성왕 7)에는 재래의 유학생 중에서 최이정(崔利貞) · 김숙정(金叔貞) · 박계업(朴季業)을 방환(放還)하고 있고, 신입한 김윤부(金允夫) · 김입지(金立之) · 박양지(朴亮之) 등 12인을 국자감(國子監)에서 습업(習業)하게 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김이오(金夷吾) · 김문울(金文蔚) · 이동(李同) 등이 함통 연간에 급제하고 있으며, 희종 연간에는 최치원(崔致遠) · 최광유(崔匡裕) 등이 뒤따라 급제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시가 거꾸로 중국에까지 알려져 전당시(全唐詩)에 작품을 전하고 있는 신라인으로는 왕거인(王巨仁)의 「분원시(憤怨詩)」를 비롯하여, 고원유(高元裕) · 김진덕(金眞德) · 설요(薛瑤) · 김지장(金地藏) · 최치원 · 김입지 · 김가기 · 김운경 등으로, 이들 대부분이 직접 중국에 들어가 한시를 배우고 익힌 유학생들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라 말 고려 초는 왕조사에서도 서로 겹치는 기간이 18년이나 되지만, 문학사의 현실에 있어서도 상당한 부분이 성격을 같이하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는 우리나라 한문학이 본격적으로 중국을 배운 시기이다.
신라 말에 당나라에 들어가 직접 중국 시를 배운 유학생과, 이들이 이룩한 시업(詩業)에 힘입어 간접으로 한시를 체험한 고려 초기 일군의 시인들이 당시의 풍상(風尙)인 만당(晩唐)을 배운 것이 이 시기 한시의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당나라를 배우면서도 바로 앞 시기의 격조 높은 성당(盛唐)을 뛰어넘어 오히려 기려(綺麗)한 육조시에 관심을 보였으며, 그들의 시작(詩作)에도 육조풍이 농후하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육조시대의 모범 문장집이라 할 수 있는 『문선(文選)』이 태학의 교재 또는 과시과목으로 채택되고 있었으므로 오히려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만당의 기미(綺靡)와 육조의 기려가 사실상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만당과 육조 사이를 내왕한 것은 자연스런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만당과 그 이전의 당시(唐詩)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두보(杜甫)나 한유(韓愈) · 백거이(白居易) 등은 정치력으로 나라를 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의 시에도 반영되고 있지만, 만당의 시인들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큰뜻이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으며, 그들에게는 시를 짓는 즐거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망국으로 치닫고 있던 신라의 경우도 이와 흡사하였다. 때문에 초기의 습작과정에서 중국시를 익히던 우리나라 시인들로서는 격조 높은 성당보다는 곱고 아름답기만 한 만당과 육조의 장식미에 쉽게 영합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형(詩形)의 선택에 있어서는 대체로 7언이 우세하며 특히 율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현상이다. 최치원의 경우도 작품 전체에서 보면 절구가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명편(名篇)으로 알려진 작품에는 칠언율시가 많다. 우리나라 한시가 일반적으로 절구보다는 율시, 5언보다는 7언에 명작이 많은 것과 같은 현상이다.
물론, 만당의 명편 가운데는 절구가 많다. 나라와 시가 함께 쇠미해진 만당에서 장편을 뽑아낼 저력이나 여유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며, 때문에 만당의 섬교(纖巧)가 단형(短型)의 절구를 즐겨 선택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추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현존하는 신라 말 고려 초 시의 대부분이 입당유학생들의 초기작이고 보면, 시를 익히는 습작과정에서 직절(直截)한 절구형식으로 명편을 제작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내용에 있어서도 대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작자 자신을 회한하고 있거나 회고적인 감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강개와 비수(悲愁)를 섬세한 미감으로 표현하려는 고심을 읽을 수 있으나, 시에 몰입함에 있어 대체로 시야가 좁아 미소(微小)한 부분묘사에서 화미(華靡)를 보여줄 뿐이다.
신라 말기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할 때에는 이미 유학생의 수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시로써 후세까지 이름을 전하고 있는 신라 말의 시인으로는 최치원 · 최광유 · 최승우(崔承祐) · 박인범(朴仁範) 등이 고작이다. 최언위(崔彦撝)는 문장으로 일세에 이름을 드날렸지만, 몇 편의 금석문자만 남기고 있을 뿐 그의 시편은 단편조차 찾아볼 수 없다.
고려의 개국으로 삼한이 다시 통일되지만, 의관전례(衣冠典禮)는 신라의 그것을 도습(蹈襲)하였으며, 시단(詩壇)의 풍토도 이후 200여년 동안 신라 말에서부터 익혀 온 만당의 풍상이 계속 지배적이었다. 더욱이, 국초에 채택한 과거제도의 실시로 고려의 문풍이 크게 떨치게 되었으며 빛나는 사장학(詞章學)의 전통이 기반을 굳히게 된다.
그러나 후세에까지 온전하게 시를 전하고 있는 이 시기의 시인으로는 초기의 오학린(吳學麟) · 최승로(崔承老)를 비롯하여 장연우(張延祐) · 최충(崔冲) · 최약(崔瀹) · 이자량(李資諒) · 이오(李오) · 최석(崔奭) · 박인량(朴寅亮) · 김연(金緣) · 최유선(崔惟善) · 곽여(郭輿) · 권적(權適) · 이자현(李資玄) · 인빈(印份) · 김부식(金富軾) · 정습명(鄭襲明) · 김부의(金富儀) · 고조기(高兆基) · 최유청(崔惟淸) · 정지상(鄭知常)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박인량 · 김부식 · 정습명 · 고조기 · 정지상 · 최유청 등이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힐 정도이다. 다만, 완려(婉麗)한 시풍으로 요체시(拗體詩)를 시범하기도 한 정지상의 작품 가운데에는 후세까지도 절창(絶唱)으로 불리는 것이 많다.
신라 말 고려 초의 200년 동안 시단은 유미(柔靡) · 경조(輕佻)한 만당풍이 속상(俗尙)이 되어 왔지만, 그러나 고려 중기에 이르러 이러한 풍상은 시대의 추세에 따라 커다란 변혁의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산문에 있어서는, 표(表) · 전(箋) · 장(章) · 주(奏) 등이 이 때까지도 사대문자로서 중요시되고 있었으므로 변려문(騈儷文)의 전통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운문에 있어서는 전 시대의 속상에 대하여 시단 내부에서 이미 거부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소식(蘇軾)으로 대표되는 송시학의 유입으로 결정적인 국면이 전개된다.
부화(浮華)한 사장(詞章)을 일삼는 당시의 과문(科文)을 가리켜 배우들의 작희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한 임춘(林椿)은 근세의 과시가 성률에 구애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문장으로 유행하는 소식의 글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일찍이 소식의 글을 읽은 일은 없지만, 구법에서 이미 암암리에 그것과 부합하고 있음을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시인하고 있다.
소식이 죽은 지 불과 수십 년에 임춘 · 이인로와 같은 시단의 중진이 동파시(東坡詩)의 묘법을 터득하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동파시의 위세가 고려 중기 시단에 크게 떨치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임춘과 이인로 등의 동파시에 대한 관심은 동파시를 배우고 익히던 초기단계의 일이거니와, 그 뒤의 후진들이 동파집(東坡集)을 읽은 것도 다만 그것을 증거로 하여 고사를 원용하는 도구로 삼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동파시로 대표되는 중국시를 수용함에 있어 풍골(風骨)과 의경(意境), 사어(辭語)와 용사(用事)의 기술에 이르기까지 그 예술적인 경계를 포괄적으로 배운다는 것은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므로, 문언(文言)으로 중국시를 배운 우리나라 한시가, 사어나 성률과 같은 형식적인 기교에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를 이규보(李奎報)는 일찍이 간파하여, 우리나라 시인들이 극복해야 할 한국시의 과제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의기론(意氣論)이다. 이로써 보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히는 이인로는 ‘무엇을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스스로 “문장은 천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라 하면서도 후천적인 공부에 주력한 시인이 되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나타내야 할 것인가?’를 문제삼은 이규보는 타고난 천재로서 자기시를 쓰는 것으로 만족한 셈이다.
김극기(金克己)와 진화(陳澕)도 유려한 솜씨로 다양한 시세계를 과시하여 모두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각광받고 있다. 이 밖에도 임춘과 오세재(吳世才)는 이인로와 더불어 당시 시단의 거점인 죽림고회(竹林高會)의 핵심 구성원이 되었으며, 김군수(金君綏) · 유승단(兪升旦) · 김양경(金良鏡)은 주로 고종 때에 활약한 중요시인으로 꼽힌다.
최자(崔滋)를 비롯한 김지대(金之岱) · 곽예(郭預) · 김구(金坵) · 이장용(李藏用) · 홍간(洪侃) 등도 이 시기를 마무리한 대표적인 시인으로 기록될 만하다.
고려는 국초부터 유교치국(儒敎治國)을 표방하였지만, 충렬왕 때에 이르기까지 사상유교(思想儒敎)가 아닌 기본유교의 수준에 머물렀다. 때문에 통경명사(通經明史)와 같은 유자들의 일상적인 글공부는 곧 문학수업으로 발전하기 마련이어서 문풍(文風)이 크게 떨쳤다.
그러나 안향(安珦)이 만년에 주자(朱子)를 숭모하면서부터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송대의 성리학에 접하게 되었으며, 백이정(白頤正) · 우탁(禹倬) · 권보(權溥) 등이 송유(宋儒)의 성리학을 연구하여 그 선구가 된다.
이로부터 이제현 · 박충좌(朴忠佐) · 이곡(李穀) 등이 백이정에게 배웠으며,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가 성균관에서 성리서를 강론하여 이색의 문하에서 박상충(朴尙衷) · 김구용(金九容) · 이숭인(李崇仁) ·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 같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성리학의 영역을 깊이 파고들지 않았기 때문에, 당송 이래의 ‘문이관도(文以貫道)’나 ‘문이재도(文以載道)’와 같은 문학관념을 문자에 드러내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정도전이 본격적인 도학문학관(道學文學觀)을 개진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물론, 백이정 · 정몽주 · 이숭인 · 길재(吉再) 등은 그들의 작품에 소강절(邵康節)이나 주자의 그것을 모방한 흔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오히려 바로 이 고려 말기에 이르러 우리나라 한시는 안정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시기의 시인으로는 이제현이 가장 대표적이다. 만상(萬象)을 구비한 그의 시는 당시 우리나라 제일의 대가로 추앙받기도 하였다. 같은 시대의 최해(崔瀣)와 이곡도 일세에 이름을 드날렸으며, 정포(鄭誧)의 유려한 시는 아름다운 작품으로 사랑을 받았다. 이색과 정몽주의 호방한 기상은 후세에 높은 칭송을 받았으며, 특히 이색의 ‘호방’과 이숭인의 ‘전아(典雅)’는 좋은 대조를 보이기까지 한다.
이 밖에도 박상충 · 권한공(權漢功) · 민사평(閔思平) · 신천(辛蕆) · 전녹생(田祿生) · 한종유(韓宗愈) · 백문보(白文寶) · 이공수(李公遂) · 이달충(李達衷) · 탁광무(卓光武) · 한수(韓脩) · 정추(鄭樞) · 설손(偰遜) · 이인복(李仁復) · 김구용 · 유숙(柳淑) · 이집(李集) · 이존오(李存吾) · 원천석(元天錫) · 원송수(元松壽) · 길재 등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성망(聲望)이 높았던 시인들이다.
조선은 그 창업과 동시에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함으로써, 문학관념에 있어서도 주자학(사상유교)이 문학 위에 군림하는 재도관(載道觀)이 성립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문학이란 한갓 도(道)를 전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러한 효용적인 문학관은 결코 문학의 생산을 방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도리어 문학의 내질(內質)에 있어서는, 김창협(金昌協)의 말과 같이, 시를 보면 그 사람까지도 알게 하는 다양한 전개를 보인다.
시단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앞 시대에서 숭상한 송시학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걸출한 시인의 배출을 보지 못한 국초에 있어서도 정이오(鄭以吾) · 이주(李胄) 등은 중당(中唐)의 고품(高品)을 제작하고 있으며, 서거정(徐居正) · 김종직(金宗直) · 김시습(金時習)에 이르러 조선왕조 시단의 터전이 굳혀진다.
서거정과 김종직은 각각 그들이 편찬한 『동문선』과 『청구풍아(靑丘風雅)』를 통하여 그들이 지향하는 시세계의 경계를 간접으로 드러내 보였다. 특히, 김종직은 그의 『청구풍아』에서, 스스로 시대의 풍상에서 멀리 떨어져, ‘호방’과 ‘신경(新警)’을 거부하고 엄중(嚴重) · 방달(放達)한 시관(詩觀)으로 일관하고 있어 시사(詩史) 연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리고 초매(超邁)한 김시습의 시세계는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세계를 열고 있다. 시 말고는 따로 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시를 위하여 시를 쓰는 낭비를 일삼게 되었으며, 시가 없으면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에 관한 모든 것도 시로써 해명한 보기 드문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시업이 다양하게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종대를 전후한 시기이다. 이행(李荇) · 박은(朴誾) · 정사룡(鄭士龍) 등 이른바 해동(海東)의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출현을 보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다른 한편 신광한(申光漢) · 나식(羅湜) · 김인후(金麟厚) 등은 수준 높은 당법(唐法)으로 당시의 시단을 다채롭게 하여준다.
박상(朴祥) · 임억령(林億齡) · 김인후는 호남시단의 선구로서도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특히 임억령과 김인후는 그 인품이 고매하여, 시도 사람과 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칠언율시에서 특장을 보인 정사룡은 다음 시기의 노수신(盧守愼) · 황정욱(黃廷彧)과 더불어 관각(館閣)의 대수(大手)로서 추앙을 받았다.
조선 초기의 안정에 힘입어 풍요로운 목릉성세(穆陵盛世)를 이룩한 선조 · 인조 연간은 시단에 있어서도 또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성시를 이룬다. 조선의 시단이 본격적으로 당을 배우고 익혀 당풍(唐風)이 크게 일어난 것도 이때이며, 그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박순(朴淳)이다.
세칭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는 이달(李達) · 백광훈(白光勳) · 최경창(崔慶昌) 등이 모두 박순으로부터 당을 배워, 고경명(高敬命) · 임제(林悌) 등과 더불어 호남시단을 함께 빛나게 하였다. 권필(權韠)과 최립(崔岦)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지만, 특히 권필의 시와 최립의 문장을 쌍벽으로 일컫는 것은 최립의 문명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시업으로 일가를 이룬 시인으로는 허봉(許葑)과 이호민(李好閔) · 차천로(車天輅) · 유몽인(柳夢寅) · 이안눌(李安訥)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이호민의 시 「용만(龍灣)」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작품 중에서는 가장 빼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이안눌의 동악시단(東岳詩壇)은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유전(流傳)되고 있다.
천류(賤類) 가운데에서도 유희경(劉希慶) · 백대붕(白大鵬) 등은 시로써 이름을 얻었으며, 황진이(黃眞伊) · 이매창(李梅窓) · 이옥봉(李玉峰) ·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여류시인으로 이름이 높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시단까지도 황량하게 하였다. 흔히, 천하가 어지러울 때 인물이 배출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목릉성세의 풍요는 오로지 전 시대의 안정에 힘입은 결과이며, 병란 때문에 인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임진왜란 · 병자호란 양란 후 숙종대에 이르는 70여 년간은 문자 그대로 시단의 공백기이다. 다만, 정두경(鄭斗卿) · 이민구(李敏求)가 적막에서 일어나 우뚝하게 시단을 돋보이게 하였을 뿐이다.
숙종대에 이르러 모처럼 태평성세를 구가하는 안정을 되찾았지만, 정치 내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당론의 가열로 사림이 다시 빛을 잃고 시업이 침체해진다. 김창흡(金昌翕) · 이광려(李匡呂) · 신광수(申光洙)등이 각각 서로 다른 처지에서 자기 시를 쓰고 있었으며, 이른바 사가(四家) 가운데에서도 이덕무(李德懋) · 유득공(柳得恭) · 박제가(朴齊家) 등의 풍류시가 이채를 발하였다.
시 · 서 · 화 삼절(三絶)로도 이름 높은 신위(申緯)의 시는 천정만상(千情萬狀)이 자유자재로 표현되어 조선시대 제일대가로 불리기도 하였거니와, 민족의 애환을 시로써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소식을 특히 사숙하였지만 그가 이룩한 독특한 시체 때문에 그의 시는 흔히 변조(變調)라는 비평을 받기도 한다.
한편, 조선 후기는 사대부의 시업이 침체해진 반면에 위항시인(委巷詩人)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홍세태(洪世泰)의 『해동유주(海東遺珠)』를 필두로, 위항시인의 시집인 『소대풍요(昭代風謠)』 · 『풍요속선(風謠續選)』 · 『풍요삼선(風謠三選)』이 60년 간격으로 간행되어, 그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전하려는 위항인의 피맺힌 소망이 이들 시집 속에 응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작의 수준에 있어서는 사대부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조수삼(趙秀三) · 이상적(李尙廸) · 정지윤(鄭芝潤) 등의 작품은 수준급이다. 박식으로 이름난 이학규(李學逵)도 만년에 시를 익혀 시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한시가 사실상 끝장이 난 한말에 이르러 이른바 한말의 사대가로 불리는 강위(姜瑋) · 이건창(李建昌) · 김택영(金澤榮) · 황현(黃玹)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강위에게 시를 배운 이건창의 발천으로 김택영과 황현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뒷날 이들 세 사람은 나란히 우리나라 한문학사의 마지막 장을 찬란하게 장식하였다.
김태준(金台俊)의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1931) 이래 한시에 대한 연구가 거듭되어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국문학 중 가장 방대한 유산인 한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그 내적 전개과정과 원리를 정확히 밝혀내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다.
더욱이, 한시는 이제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연구의 대상일 뿐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한시에 익숙해지지 않게 되면서도 한시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될 어려운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시를 제모습 그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연구자는 다음 두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 우리나라 한시가 중국시의 전통을 그대로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중국시를 문언으로 체험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시적 표현의 도구로서의 언어인 중국어에 소원한 우리나라 시인들이 제작한 한시는 필연적으로 개념의 시, 정신의 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 두 사항은 곧 우리 나라 한시의 한계를 말해 주는 것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중국시와 우리 나라 한시의 편차를 가늠하는 특징적인 사실로 지적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한시가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한시연구에서 문제삼아야 할 중요한 과제를 설정한다면 다음 몇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 우리나라 한시를 역사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시의 원산지인 육조 · 당 · 송 등 중국시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 둘째, 자료의 선택과 작품의 평가에 있어서는 한시를 제작한 당시의 시인 · 비평가들이 직접 편찬에 참여한 선발책자와 비평서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셋째, 우리나라 시인 · 비평가들이 중국의 문학이론을 수용할 때 보여 준 자각적인 의지를 밝혀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시로서의 단순한 이식이 아닌 한국적 전개과정을 주목하여, 단편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한시비평이론의 내적 질서를 파악하여야 한다. 넷째, 중국시를 문언으로 체험함으로써 개념의 시, 정신의 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시가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취(意趣)를 탐색, 발굴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