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언절구 40수로 이루어졌으며,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권49에 수록되어 있다. 신위의 「소악부」는 작자가 평소에 기억하고 있던 시조를 한역한 것으로서, 시조가 일시적으로 가창되다가 인멸될 것을 우려하여 후대에 길이 보존할 목적으로 시도한 것이라 한다.
이 작품은 일시에 제작된 것이 아니고, 작자가 강화유수 재임기간인 1828년(순조 28) 9월에서 1830년 7월까지 6수를 지었고, 그 뒤 자하산장에 은거하고 있던 1831년 6월까지 34수를 지어, 이것을 모두 정리하여 40수를 완성하고 자서를 쓴 것으로 판단된다.
시조를 한역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는데, 여기에서는 다섯 가지 정도의 방법을 사용하여 한역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초장을 기구에 배당하는 경우, 둘째는 종장을 전구 · 결구에 배당하는 경우, 셋째는 시조의 1장을 생략하는 경우, 넷째는 시조 3장과 한시 3구 외에 한시 1구를 첨가하는 경우, 다섯째는 환골탈태하는 경우이다.
수록작품 가운데에 작자를 알 수 있는 것은 24수이다. 명옥(明玉) · 매화(梅花) · 이개(李塏) · 이조년(李兆年) · 이유(李柔) · 이명한(李明漢) · 윤선도(尹善道) · 유자신(柳自新) · 송인(宋寅) · 기대승(奇大升) · 장만(張晩) · 이정(李鼎) · 한호(韓濩) · 황진이(黃眞伊) · 서익(徐益) · 박인로(朴仁老) · 조경렴(趙慶濂) · 이정신(李廷藎) · 정온(鄭蘊) · 김상용(金尙容)의 순으로 20인의 작품을 실었다. 황진이의 작품이 3수, 이명한과 윤선도의 작품이 각각 2수씩 수록되었다. 그리고 작자 미상이 16수인데, 이 중에서 출전조차 확인되지 않는 것이 2수이다.
이 작품은 이유원(李裕元)의 「가오소악부(嘉梧小樂府)」를 짓게 한 동기가 되었으며, 후대의 사대부들에게 많이 애송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현이 처음 ‘소악부’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그 이후 신위의 이 작품에서 다시 이 이름이 쓰이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악부가 번창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의의에 대한 자각과 그 표현으로 의식을 형상화한 것이며, 또한 시문의 보완을 위한 작품으로서 출현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