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구(仲久), 호는 호소와(號笑窩), 소악루(小岳樓). 양천(陽川) 출신.
정종의 제4왕자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9세손으로 그의 5대 조부인 대구부사 이준도(李遵道, 1532∼1584)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절친한 벗이었다. 이준도의 손자이자 이유의 증조부인 이명운(李命運)은 1613년에 광해군이 모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연안 김씨(延安金氏)를 폐위하려 하자 홍문관 교리 벼슬을 버리고 양천현 현내면 고양리 한강 기슭으로 물러 나와 살게 되었다. 따라서 세거지는 양천(옛 이름은 파릉(巴陵), 현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 궁산)이다.
그의 집안은 율곡계의 조선 성리학통을 대대로 계승하였으며 이유 자신도 〈옥경몽유가〉에서 언급하였듯이 “일찍이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이 나고 벼슬에 뜻이 없어 오직 성리학의 연구와 시(詩)와 풍류(風流)로 일세(一世)에 이름을 떨치니 세상에서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39세가 되던 1714년(숙종 40)에 생원과 세마위수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57세 때인 1732년(영조 8)에는 큰 형 강(漮)의 말을 듣고 장릉 참봉(莊陵參奉)으로 나갔으며 금부도사·감찰을 역임했다. 장릉 참봉 재임 시절에 단종의 슬픈 사연을 닮은 시조 〈자규삼첩(子規三疊)〉과 사군(四郡)의 수려한 경치를 닮은 기행 가사인 〈사군별곡(四郡別曲)〉을 지었다. 양천에 있던 악양루 옛 터에 소악루를 재건하였다.
59∼62세 때인 1735년(영조 9)∼1738년(영조 14)에는 동복(옛 이름은 복천, 현 전남 화순군 동복면) 현감(縣監)을 지냈다. 이곳 백성들이 그의 업적을 기려 비를 세워 칭송했다. 이 시기에 이곳 백성들을 교화하고 훈육할 목적으로 가사 〈충효가(忠孝歌)〉를 지었다.
63∼78세 때인 1738∼1753년(영조 29)에는 양천으로 귀향하고 〈귀거래사(歸去來詞)〉를 지었다. 소악루를 중심으로 학문과 창작활동을 했다. 돌아가실 때까지 소악루에서 당대의 시인묵객들과 시회(詩會)와 금가(琴歌)로 말년을 보냈다. 자신을 ‘강산주인’이라 부르고 병계 윤봉구, 남당 한원진, 회헌 조관빈, 포암 윤봉조, 사천 이병연 등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에 스스로 적선이 되어 천상의 세계를 형상화한 가사 〈옥경몽유가(玉京夢遊歌)〉를, 군주를 사모하는 〈망미인가(望美人歌)〉를 창작하였다. 묘는 은행정리(銀杏亭里)에 있다.
1978년 2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혜음령 남쪽에 제단을 세워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