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상중(尙中). 자는 문숙(文叔), 호는 우촌(雨村)·삼수당(三秀堂). 충주 출신. 아버지는 남이우(南履佑)이며, 어머니는 이기풍(李基豊)의 딸 이씨(李氏)이다. 5대조인 남익훈(南益熏)이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판·함경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이후로 고조부인 남기명(南紀明)은 평택현감에 그쳤고, 증조부인 남태헌(南泰憲)은 호조정랑에 그쳤으며, 조부인 남규로(南奎老)와 아버지인 남이우는 벼슬을 하지 못했다.
남상교는 이세기(李世夔)의 딸 연안 이씨(1779∼1827)와 결혼하였으나, 48세에 혼자가 되는 불운을 맞는다. 늦은 나이인 55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벼슬이 현풍현감(玄風縣監)·충주목사를 거쳐 1865년(고종 2)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제수받았다. 품계는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 동생 남탄교(南坦敎)의 아들 남종삼(南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켰고,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남종삼은 새남터에서, 남상교는 공주 진영(鎭營)의 옥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상교는 순교한 천주교 신자일 뿐 아니라 선정 치리자로서도 칭앙을 받았다. 현풍현감(1837년 12월∼1840년 12월)을 지냈을 당시, 일가족이 현풍에 3년 동안 살았는데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그 덕을 기려 청덕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현풍 사무소에 있다가 1974년 5월 27일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더불어 실학을 추구하였으며, 덕망 높은 치리자와 농산 학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남상교는 정약용, 이학규(李學逵, 1770∼1835) 이후 남인계 시인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자 한시문에 능한 문학가로서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상교와 직접 교유한 홍한주(洪翰周, 1798∼1868)는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그의 시를 일컬어 ‘시인(詩人)의 시’라고 극찬하였다.
남상교는 주로 연작형 시를 즐겨 지었는데,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읊은 18수 연작시인 〈미인시(美人詩)〉를 비롯하여 〈산거절구(山居絶句)〉, 〈병중서사(病中書事)〉, 〈유서(柳絮)〉 등이 널리 읽혔으며 많은 시들이 『우촌시고(雨村詩藁)』, 『삼수당시집(三秀堂詩集)』, 『청랑간관초고(靑琅玕館初稿)』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