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지언(止彦). 아버지는 공조판서 유잠(柳潛)이며, 어머니는 증 호조참판 정승렴(鄭承廉)의 딸이다. 광해군의 장인이며, 이담(李湛)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진사시에 합격, 태릉참봉을 거쳐 돈녕부직장(敦寧府直長)·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평강현감·호조좌랑·김포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579년(선조 12) 형조정랑·김제군수를 거쳐 1585년 장악원첨정 겸 내승(掌樂院僉正兼內乘)이 되었다.
1587년 셋째 딸이 군부인으로 간택되었으니, 뒷날 광해군의 비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특명으로 안악현감에 임명되어 역도들을 잡아 처리하고, 광주목사(廣州牧使)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대가(大駕)를 호종하고, 평양에서 묘사주(廟社主)를 모시고 광해군을 따라 강원도 방면으로 나갔다가 그 해 겨울 성천으로 나왔는데 특명으로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성천부사·개성유수에 이어 한성부우윤으로 있을 때인 1598년 명군을 구타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그 뒤 한성판윤·도총부도총관 등을 지냈으며,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문양부원군(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그러나 평소와 다름없이 겸공(謙恭)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근신하고 권문세가로 행세하는 일이 없었다. 1610년(광해군 2)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조반정 때 관작과 봉호가 추탈되었으며, 아들 유희분(柳希奮)·유희발(柳希發)·유희량(柳希亮) 등은 처형,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