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음성(陰城).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 할아버지는 박자회(朴子回)이고,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이며,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이다. 전라도 광주에 세거(世居)하였다. 10세 때 정황(丁潢)의 문하에 들어갔다.
1546년 (명종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나주 선도면(船道面)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山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과 함께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또, 향약을 실시하고, 기대승(奇大升) · 박순(朴淳) · 이이(李珥) · 노사신(盧思愼) 등과 교유하였다. 1560년 목사 유경심(柳景深)을 도와 향교를 중수하고 학헌(學憲) · 학규(學規)를 제정하였다.
1568년(선조 1) 학행으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다. 157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종부시주부가 되었으며, 운봉현감이 되었을 때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를 세웠다. 1578년 전라도 · 충청도의 도사를 거쳐 1579년 예조정랑, 1580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을 거쳐 영광군수 · 밀양부사가 되었는데, 두 곳 모두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후 광주 · 전주의 교수와 사예 · 사섬시정 · 봉상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가 일어나자, 1581년에 박광옥이 정여립의 청현직(淸顯職) 진출을 막은 이경중(李敬中)을 탄핵했던 일이 문제가 되어 삭탈관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신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있으면서 고경명(高敬命) ·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고향의 의병도청(義兵都廳)에서 군대의 장비와 양식을 조달하였다.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무능을 탄핵했으며, 새로 감사에 부임한 권율(權慄)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의병 활동의 공로로 다시 관직에 올라 나주목사로 재임하다가 죽었다. 1602년(선조 35) 나주 벽진촌(碧津村)에 세워진 의열사(義烈祠)에 제향되었다. 의열사는 뒤에 벽진서원으로 바뀌었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의 일부가 『회재유집(懷齋遺集)』에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