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종실(宗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4대손이며,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희안군(喜安君) 이집(李輯)이고, 아버지는 금천수(錦川守) 이감(李瑊)이며, 어머니는 서성김씨(瑞城金氏)로 감찰 김윤창(金允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68년(선조 1)에 성균관의 유생으로 들어갔으며, 157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록에 선임되었다. 1574년 홍문관정자에 이어 저작·정언(正言)을 거쳐, 1576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이어 이듬해는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158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고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응교(應敎)를 거쳐 1584년 집의(執義)에 이르렀으나, 대사헌 정철(鄭澈)과의 불화로 경상도 추쇄어사(推刷御史)로 좌천되었다가 밀양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589년 정여립이 모반하여 패사하자, 류성룡(柳成龍)은 이경중의 예측이 들어맞았다고 상소했고, 거기에 힘입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