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중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저작,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공직(公直)
단애(丹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2년(중종 37)
사망 연도
1584년(선조 17)
본관
전주(全州)
주요 관직
저작|정언(正言)|수찬(修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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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저작,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직(公直), 호는 단애(丹崖). 종실(宗室)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의 4대손이며, 강양군(江陽君) 이숙(李潚)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희안군(喜安君) 이집(李輯)이고, 아버지는 금천수(錦川守) 이감(李瑊)이며, 어머니는 서성김씨(瑞城金氏)로 감찰 김윤창(金允彰)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8년(선조 1)에 성균관의 유생으로 들어갔으며, 157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록에 선임되었다. 1574년 홍문관정자에 이어 저작·정언(正言)을 거쳐, 1576년 수찬(修撰)을 지내고 이어 이듬해는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1581년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정여립(鄭汝立)이 당시 명망이 있음을 보고 극력 배척하며, 청현(淸顯)의 자리에 두지 말라고 논책하였다가 도리어 정인홍(鄭仁弘)·박광옥(朴光玉)·정탁(鄭琢) 등 동인의 언관들로부터 논핵(論劾)당하여 파직되었다.

뒤에 응교(應敎)를 거쳐 1584년 집의(執義)에 이르렀으나, 대사헌 정철(鄭澈)과의 불화로 경상도 추쇄어사(推刷御史)로 좌천되었다가 밀양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589년 정여립이 모반하여 패사하자, 류성룡(柳成龍)은 이경중의 예측이 들어맞았다고 상소했고, 거기에 힘입어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기언별집(記言別集)』(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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