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 호군(護軍) 유소(柳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유자온(柳子溫)이다. 아버지는 정랑 유공권(柳公權)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진사 남팔준(南八俊)의 딸이다. 족질은 유성룡(柳成龍)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 ·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1546년(명종 1)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1547년 예조좌랑 ·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이 해에 정미사화(문정왕후와 이파를 비방한 벽서가 양재역에서 발견되어, 부제학 정언의의 고발로 20여명이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 등을 거쳐 1558년 7월 종성부사가 되었으나, 백성을 부역시켜 언전(堰田: 제방을 쌓아 만든 밭)을 개간하려는 윤원형(尹元衡)에 반대하다가 1558년 윤 7월 정주목사로 전출되었다.
1560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1568년(선조 1)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판 · 대사헌을 거쳐 1571년 병조참판 ·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직 중에 병이 있어, 상경 도중 장단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구촌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