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심 ()

구촌집
구촌집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태호(太浩)
구촌(龜村)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16년(중종 11)
사망 연도
1571년(선조 4)
본관
풍산(豊山)
주요 관직
회인현감|정주목사|대사헌|병조참판|평안도관찰
관련 사건
정미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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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대사헌, 병조참판, 평안도관찰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태호(太浩), 호는 구촌(龜村). 호군(護軍) 유소(柳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사 유자온(柳子溫)이다. 아버지는 정랑 유공권(柳公權)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진사 남팔준(南八俊)의 딸이다. 족질은 유성룡(柳成龍)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 ·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냈다. 1546년(명종 1)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1547년 예조좌랑 ·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이 되었다.

이 해에 정미사화(문정왕후와 이파를 비방한 벽서가 양재역에서 발견되어, 부제학 정언의의 고발로 20여명이 처형당한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51년 다시 기용되어 회인현감 등을 거쳐 1558년 7월 종성부사가 되었으나, 백성을 부역시켜 언전(堰田: 제방을 쌓아 만든 밭)을 개간하려는 윤원형(尹元衡)에 반대하다가 1558년 윤 7월 정주목사로 전출되었다.

1560년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고, 1568년(선조 1) 호조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예조참판 · 대사헌을 거쳐 1571년 병조참판 ·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평안도관찰사 재직 중에 병이 있어, 상경 도중 장단에서 죽었다. 저서로는 『구촌집』이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학사집(鶴沙集)』
『서애집(西厓集)』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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