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중길(仲吉), 호는 한천(寒泉)·삼곡(三谷). 박겸문(朴兼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환(朴煥)이고, 아버지는 군수 박사공(朴思恭)이며 어머니는 윤징(尹澄)의 딸이다. 장령 박경선(朴慶先)의 아우다.
1582년(선조 1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청도조전장(淸都助戰將)으로 참전하고 순변사 이일(李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하였다.
해주목사에 임명되어서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의 복구와 민폐의 제거에 힘써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수축하여 방비태세를 굳건히 하였다. 1594년(선조 27)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관민을 소집, 훈련시켜 전시태세를 갖추고 전공을 세워 정부의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전주부윤으로 있으면서 성을 버리고 달아나 파직당하였다. 전란이 평정된 뒤 다시 서흥부사(瑞興府使)로 기용되었고, 뒤이어 동래부사·삼척부사·형조참의 등 내외 관직을 지냈다.
광해군 때 광주목사(光州牧使)·양주목사·판결사 등을 지내고, 1618년(광해군 10) 경상도관찰사, 1622년 공홍도(公洪道: 충청도)의 관찰사가 되었다. 판결사로 있을 때는 인목대비(仁穆大妃)에 대한 폐모론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 때의 행적에 대한 탄핵을 받아 파직 당하였다.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으로 인한 인조의 파천을 호종하지 않은 죄목으로 문외출송당하였다. 시를 잘 쓰는 것으로 유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