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은 러시아 사람들, 즉 러시안(Russian)을 한자음으로 옮긴 것이다. 이들은 흑룡강(黑龍江)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듬 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烏蘇里江)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군사를 보내어 공격, 축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구식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1654년 2월에 청나라 사신 한거원(韓巨源)을 보내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 기고수(旗鼓手) 등 50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하였다.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에 왈가(曰可) 지방에서 배를 타고 후통강(厚通江)으로 내려갔다.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 적군은 7일 만에 도망갔다. 조선 군사는 전승을 거두고 5월 16일에 회군해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는데, 이것이 제1차 정벌이었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申瀏)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다.
조선 군사들은 5월에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다. 6월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났다. 러시아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 군사가 용감하게 나아가 화전(火箭)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져 도망갔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되었다. 조선 측에서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가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하였다. 이것이 제2차 정벌이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였다.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