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 호는 낙봉(駱峰)·기재(企齋)·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공조참판 신장(申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신숙주(申叔舟)이며,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신형(申泂)이다. 어머니는 사포(司圃) 정보(鄭溥)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0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의 특혜를 받았다. 1513년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에 등용되고, 이어서 홍문관부수찬·교리·정언(正言)·공조정랑을 역임하고,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으로 경연의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 때 중종이 학문을 장려하며 유학자를 우대하고 주야로 경연을 열어 학자들과 학문을 논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고금의 시무(時務)를 논하여 채택되는 바가 매우 많았으며, 1518년 특명으로 대사성에 올랐다. 이듬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 일파라고 탄핵을 받아 삼척부사로 좌천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이어서 다시 여주로 추방, 18년 동안 칩거하였다. 1538년 윤인경(尹仁鏡)이 이조판서가 되어 기묘사화에서 화를 입은 사람들을 서용하자 대사성으로 복직되었다. 대사간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우윤·병조참판을 역임하고, 1540년 대사헌이 되어 관리들의 기강을 엄히 하였다.
1542년 세자시강원의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겸임하고, 이어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듬해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쳐, 1544년에는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 때 대제학을 거쳐, 명종 즉위와 함께 우참찬이 되었으며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소윤(小尹)에 가담,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濟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대제학·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경연동지사(經筵同知事)·춘추관동지사(春秋館同知事)를 겸임하였다.
뒤에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이어 좌참찬·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548년 (명종 3)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좌찬성이 되어 지성균관사와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1553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1554년에 사직하고 그 이듬해에 병사하였다.
문장에 능하여 시문을 많이 지었으며, 학문을 숭상하여 대사성이 되었을 때에는 학도들이 신광한에게 운집하였다. 또한, 청렴하여 이조판서가 되어서는 인사를 공정히 하고, 유일(遺逸: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사는 학덕이 높은 선비)을 많이 등용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맹자와 한유(韓愈)를 기준으로 했고, 시문에 있어서는 두보(杜甫)를 본받았다. 저서로 『기재집(企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