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은 869년(경문왕 9)에 왕자인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使) 소판(蘇判) 김윤(金胤)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875년 당나라 예부시랑 최항(崔沆) 아래에서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이 때 함께 응시한 발해의 유학생 오소도(烏昭度)가 수석합격을 하고 이동이 차석을 차지함으로써 신라와 발해의 빈공과 쟁장사건(賓貢科爭長事件)의 발단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라는 906년에 실시된 빈공과에서 최언위(崔彦僞)가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을 누르고 수석으로 합격할 때까지 30여년간 커다란 수치감과 굴욕감을 인내해야 하였다.
최언위의 수석 차지는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의 항의를 불러일으켜서, 이른바 신라와 발해의 당 빈공과 쟁장사건으로 번져 그뒤 양국의 관계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