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2년(문무왕 12)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백수성(白水城 : 지금의 재령)을 치려 할 때 신라 구원군의 비장(裨將)이었던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원술을 따라 보좌역으로 출진하였다.
신라군이 싸움에 패하여 대아찬(大阿飡) 효천(曉川), 사찬(沙飡) 의문(義文), 산세(山世) 등이 전사하였다. 원술도 싸워 죽으려 하였으나 담릉이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장부가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자리를 가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만일, 죽어서 패배한 것을 만회하지 못하면, 어찌 살아서 뒷날의 성공을 도모하는 것만 같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원술이 말을 안 듣고 나가려 하므로 담릉이 말재갈을 잡아당겨 못 나가게 하였다. 원술이 패군을 따라 돌아오자, 김유신은 원술을 크게 꾸짖어 평생 보지 않았다.
김유신이 죽은 뒤 원술이 어머니를 뵈려 하였으나 아버지의 아들 노릇을 못한 사람을 어찌 어미가 보겠느냐며 끝까지 만나주지 않았으므로, 원술이 통곡하면서 “담릉의 잘못으로 일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구나!” 하고는 태백산에 은거하였다. 이 담릉의 사례는 당시 화랑들의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이 철저함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