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기 ()

도교
인물
삼국시대 신라에 도교를 전한 최초의 도교인. 문장가.
이칭
사원(士元)
일구당(一丘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859년
목차
정의
삼국시대 신라에 도교를 전한 최초의 도교인. 문장가.
생애 및 활동사항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43 <원효의상변증설 元曉義湘辨證說>에 인용된 ≪해동전도록 海東傳道錄≫에 의하면, 그는 당나라 문종(文宗) 때 최승우(崔承祐)·자혜(慈惠 : 후의 義湘)와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였는데, 당시에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제도인 빈공과(賓貢科)에 먼저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또, 일설에는 벼슬이 화주참군(華洲參軍)과 장안위(長安慰)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는 본래 성품이 고요하여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도(道)를 탐구하기 좋아하여 이에 대한 학문을 널리 배우고 익혔다. 또,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술법의 일종인 복기법(服氣法)을 수련하는 등 도교의 수행에도 힘썼다.

마침내 벼슬까지 그만두고 종남산(終南山)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여 손수 기화방초(奇花芳草:진기한 꽃과 아름다운 풀)를 가꾸고 항상 향을 피우고 정좌하여 명상에 잠겼다. 주로 노자(老子)의 ≪도덕경≫과 기타 선서(仙書)를 심독했는데 3년 동안 쉬지 않고 공부한 뒤 신라로 귀국하였다. 이때 당나라 시인 장효표(章孝標)가 이별의 시를 지었다고 하는데, 홍만종(洪萬宗)의 ≪해동이적 海東異蹟≫에는 그 시의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얼마 뒤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가서 계속 도교를 수련하였는데, 858년 12월 당나라 왕에게 표(表)를 올려 말하기를 “신은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아 영문대시랑(英文臺侍郎)이 되기 위해 내년 2월 25일 승천한다.”고 하였다. 왕은 매우 기이하게 여겨 중사(中使)를 보내 그를 입궐하도록 하였는데, 굳이 사양하자 왕은 옥황상제의 조서라도 보여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다른 신선이 가지고 있어 인간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은 향·약·비단과 함께 궁녀 네 명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고, 다시 중사 두 명을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는 홀로 고요한 방에 거처하였는데, 밤만 되면 실내에서 사람들이 웃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사들이 몰래 엿보니 선관(仙官)과 선녀들이 각각 용과 봉(鳳)을 타고 위엄 있게 서로 마주보고 있으므로 궁녀와 중사가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2월 25일이 되자 봄경치가 아름답고 꽃이 만발하였는데 오색구름이 피어 오르면서 학이 울고, 난새[鸞]와 백곡(白鵠)이 날며, 생황과 피리소리, 금석(金石)의 풍악이 함께 울리면서 깃털 지붕을 한 경옥(瓊玉) 수레가 나타나니, 깃발이 하늘에 가득 차서 신선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그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조정의 관원과 선비·서민 등 구경하는 사람들이 산과 골짜기를 가득 메웠는데, 이 기이한 현상을 보고 감탄하여 절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이후로는 김가기가 승천한 날에는 모든 도교인들이 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해동이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림광기 事林廣記≫를 참고하면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의 승천일에는 모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그렇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라도 김가기가 진선(眞仙)임을 모르는 자가 없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김도사를 좋아하지 않아서 도교의 서적이 전해 오지 않아 모두 김가기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중국 사람이 와서 물어 보아도 마침내 대답하지를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일설에는 김가기가 벼슬을 그만두고 종남산에 은거할 때 최승우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를 만났는데, 자혜도 마침 이 절에 머물고 있어서 자혜와 신원지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신원지는 김가기와 최승우가 자혜와 친한 사이임을 알고 그 뒤로 서로 친분을 맺었다.

이때 종리 장군(鍾離將軍)이 찾아오니, 신원지는 이 세 사람을 종리에게 소개하고 도교의 술법을 전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종리가 이를 허락하고 말하기를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의 지결(旨訣)이 있어서 도교가 선양될 것이다. 도교가 크게 성행하여 지선(地仙) 200명이 나와서 도교를 널리 펼칠 것이다.”하고는 도법을 전수하였다.

당시에 종리는 이들에게 청화비문(靑華祕文)·영보필법(靈寶畢法)·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금고(金誥)·내관(內觀)·옥문보록(玉文寶錄)·천둔(天遁)·연마법(鍊魔法)·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황정경(黃庭經)·용호경(龍虎經)·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 등의 책과 구결(口訣)을 전수하고, 따로 연등(燃燈)을 전하였다고 한다.

≪해동전도록≫을 보면, 김가기·최승우·자혜를 신라에 최초로 도교를 전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종리는 중국 도교의 남종(南宗)에 속하는데 김가기가 그에게서 도를 전수받은 것으로 본다면, 김가기는 중국의 도교와 도교 경전을 신라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라 추측된다.

결국 그는 당시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하였다. ≪택리지≫에는 김가기가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
『동해이적(海東異蹟)』
『연려실기술』
『동사강목(東史綱目)』
『택리지(擇里志)』(이중환)
『해동역사(海東繹史)』(한치윤)
『전당시(全唐詩)』
『태평광기(太平廣記)』
『조선도교사』(이능화)
『운급칠첨(雲笈七籤)』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