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묘(關聖廟)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초부터 관왕묘를 건립하여 일반 서민에까지도 그 신앙이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정유의 왜란 때에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선조 31) 처음으로 서울 숭례문 밖에 남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선조실록』 31년 4월 기묘조에 명나라의 장수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接伴官) 이흘(李忔)의 서계(書啓)에 남관왕묘의 건립에 따른 경위가 기술되어 있다.
진유격은 그가 거처하는 뒤뜰에 있는 낡은 집을 이용하여 관왕묘를 건립하고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시설이 완비되지는 못하였는데, 그 때 이흘을 불러서 말하기를 “어제 양노야(楊老爺:명나라의 장수 楊鎬)를 찾아서 관왕묘의 건립에 관한 것을 물어보니 찬성하면서 더 넓은 곳에 크게 건립할 뜻을 비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흘에게 조선의 도움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반드시 우리 군사를 쓰겠지만 목수·미장이 등은 조선의 공인을 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우리를 위한 일만은 아니고 조선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니 국왕에게도 알려야 할 것이다.”
이렇듯 관왕묘의 건립은 명나라의 장수들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다. 조선의 왕실에서도 그 건축비용을 보조하였으며, 따로이 관왕묘의 건립을 맡아보는 도감관(都監官)을 정하여 돕게 하였다.
『증보문헌비고』 권61 예고(禮考)에 따르면, 임진·정유의 난에 전투가 있을 때 자주 관왕의 영혼이 나타나 신병(神兵)이 명나라 군사를 도왔다고 했는데, 이것을 보면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묘를 건립하는 데 힘쓴 것은 아마도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왕묘가 건립되자 양호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관왕의 생일이 5월 13일이므로 이날 제례를 올리자고 하였으며, 선조의 참례를 강요하였다. 결국은 선조가 직접 묘에 나가 분향하고 잇달아 삼작(三爵)을 올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조정의 대신들은 관왕묘의 제례를 비판하게 되었다. 중국의 일개 장수인 관우에게 조선의 국왕이 배례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었으며, 이 같은 논쟁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남관왕묘가 건립된 이듬해인 1599년에 또 하나의 관왕묘인 동관왕묘를 세울 계획이 수립되었다. 건립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헌부의 장계에 의하면 “동관왕묘의 건립은 중국의 건의에 의한 부득이한 일이다.”라고 하였으니, 동관왕묘의 건립도 사실상 명나라의 종용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관왕묘 건립에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뒤따랐다. 『선조실록』 32년 4월 무인조에 관왕묘의 위치 선정에 관한 기사가 있다. 선조는 정원(政院)에 보낸 비밀전교에서 새로운 관왕묘의 위치에 대해서 “전일에는 흥인문 밖에 건립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또 남대문에 설치한다고 하니 무슨 까닭이냐, 전일의 계획은 어찌된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리고 “남대문에는 이미 관왕묘가 있으니 동대문에 설치하도록 명나라의 섭정국(葉政國)에게 말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서울의 동쪽이 지리적으로 허(虛)하다는 도참사상에 의한 것이었다. 선조는 끝내 동대문 밖이 안 된다면, 차라리 훈련원에 건립하여 무사들이 관왕의 정신을 이어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일 끝에 관왕묘는 동대문 밖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동관왕묘의 건립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것은 공사의 규모가 너무 커서 백성과 군사를 부역시켜야 하는 문제였다. 동관왕묘는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마침내 1602년 봄에 준공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서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에 있는 남·동관왕묘 외에 지방에서도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1598년을 전후하여 지방에서는 강진·안동·성주·남원 등 네 곳에 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지방의 관왕묘 건립시기에 관해서는 『연려실기술』 별집 권4와 『해동성적지(海東聖蹟志)』의 묘사조(廟祠條),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다만, 건립연도는 문헌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건립자에 대해서는 일정하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전라도의 강진현 고금도(古今島)에 명나라의 장수 진린(陳璘)이 건립하였으며, 1684년에 개수하면서 이순신(李舜臣)과 진인을 별사(別祠)에 배향하였다.
안동의 관왕묘는 명나라의 진정영도사(眞定營都司)인 설호신(薛虎臣)이 건립하였다. 묘 안에는 석상(石像)을 봉안하였으며, 처음에는 안동 성내에 있었으나 1606년 서악(西岳)의 동대(東臺)로 이안(移安)하였다.
성주의 관왕묘 또한 명나라의 장수 모국기(茅國器)가 건립하였다. 소상(塑像)을 봉안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성주성 동문 밖에 있다가 1727년(영조 3)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겼다.
남원의 관왕묘는 서문 밖에 있었다. 명나라의 도독 유정(劉綎)이 건립하였다. 1698년에 신상(神像)을 개건하였는데 모두 중국의 관왕묘를 모방하였으며, 명나라의 장수인 총부중군(摠府中軍) 이신방(李新芳)·장표(蔣表)·모승선(毛承先) 등을 배향하였다.
그리고 고종 때에 와서 다시 서울에 북묘·서묘, 지방에는 전주·하동 등에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종 당시의 위태로운 정세에서 관왕묘를 통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정신을 일깨운 것으로 보인다.
1901년 조서에서 “관왕묘를 숭상한 것이 지금까지 3백여 년이다. 관왕의 충의는 천추에 길이 빛난다.”고 하고, 관왕의 호를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고 하였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과 용산구 후암동에 동묘와 남묘가 남아 있다.
선조 이래로 관왕묘에 특히 관심을 보인 왕은 숙종이다. 숙종은 무안왕(武安王)의 충의는 진실로 가탄할 만하며 관왕묘를 지나면 감회가 일어난다고 하여, 관왕묘에 역림(歷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우의정과 좌의정에게 관왕묘 참례에 관한 절목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그때 배례와 수읍(手揖)의 의견이 나왔는데, 숙종은 수읍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 같은 관왕묘 참례에 관한 문제는 자주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1709년(숙종 35)에 왕은 사관에게 명하여 선조조에 관왕묘에서 행하던 행례의절(行禮儀節)을 실록에서 찾아내라고 하였다.
사관이 “선조 때에는 관왕묘에서 재배의 예를 행하였다.”고 하자, 숙종은 자신도 이에 따르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숙종실록』 36년 3월 정묘조에 의하면, 숙종은 당시의 좌의정 서종태(徐宗泰)와 판부사(判府事) 이순명(李順命)에게 “선조는 배례하였는데 나도 배례를 해야 하는가.”하고 물었다.
서종태는 선조 당시에는 명나라의 장수들의 압력에 못이겨서 한 것인 만큼 이제는 읍례가 적당하다고 하였다. 그 이유 또한 관우는 일개 장수였으므로 국왕이 배례를 하는 일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관우의 호가 무안왕이며 축문에도 ‘감소고우무안왕(敢昭告于武安王)’이라고 하였으니 배례가 좋다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 관우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보인다.
1701년에 숙종은 모든 지방의 관왕묘의 제식을 선무사(宣武祠)의 예에 따라 거행하라고 하였으며, 매년 경칩과 상강일에 향축하도록 하였다. 제수는 변두(籩豆)이고 헌관(獻官)은 고을의 영장(營將) 또는 당상무수령(堂上武守令) 등이 하도록 하였다.
정조도 관왕묘에 관심을 기울여, 1786년에 친히 「관묘악장(關廟樂章)」을 지어 처음으로 관왕묘의 행례(行禮)에 쓰게 하였다. 1832년에는 순조가 남관왕묘에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