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경 ()

동명집
동명집
유교
인물
조선후기 『동명집』을 저술한 문인. 학자.
이칭
군평(君平)
동명(東溟)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7년(선조 30)
사망 연도
1673년(현종 14)
본관
온양(溫陽)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부수찬|정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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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동명집』을 저술한 문인. 학자.
개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군평(君平), 호는 동명(東溟).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정회(鄭晦)이며, 어머니는 광주정씨(光州鄭氏)로 사헌부장령 정이주(鄭以周)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이다. 할아버지 정지승(鄭之升)과 증조부 정담(鄭䃫), 종증조부 정염(鄭염)·정작(鄭碏)은 모두 시인으로 이름이 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세 때 별시 초선(初選)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1626년(인조 4) 문학으로 이름있는 중국의 사신이 왔을 때 그는 벼슬없는 선비로서 부름을 받아 김류(金瑬) 등과 함께 중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1629년 별시문과에 장원, 부수찬·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북방의 호족(胡族)인 청나라가 강성하여지자 「완급론(緩急論)」을 지어 무비(武備)의 급함을 강조하였다. 병자호란 때 척화·강화의 양론이 분분하자, 그는 10조(條)의 소를 올려 대책을 강조하고, 또 「어적10난(禦敵十難)」이라는 글을 지어 올렸으나 조정에서 채택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고 「법편(法篇)」·「징편(懲篇)」 등 2편의 풍시(諷詩)를 지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임금이 하여야 할 절실한 도리를 27편의 풍시로 지어올려 효종으로부터 호피(虎皮)를 하사받았다.

그 뒤 1656년(효종 7)에 「칠조소(七條疏)」와 「원이설(原理說)」을 지어 올렸다. 1669년(현종 10)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참판·공조참판 겸 승문원제조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노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조판서·대제학을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26권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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