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해 1294년(충렬왕 20) 직사관(直史館)에 임명되고 원나라에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다.
뒤에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으면서 총애를 받았다. 충선왕이 집권하게 되자 최성지(崔誠之)와 함께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충선왕이 귀국하자 측근에서 수시로 인견하였고, 1309년(충선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 1310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1311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 밀직사(密直使), 1312년 첨의평리를 역임하였다.
오랫동안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부정을 행해 이사온(李思溫) · 김심(金深) 등의 탄핵을 받아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왕의 비호로 곧 석방되고 오히려 이사온 등이 유배당했다.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남으로 강절(江浙)에 유행(遊行)해서 보타산(寶陀山)에 이르렀는데, 이 때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수행하였다.
충숙왕 초에 삼사사를 거쳐 찬성사에 전임, 1314년(충숙왕 1) 권보(權溥) · 이진(李瑱) 등과 함께 성균관에 모여 강남에서 새로 구입한 서적들을 고열(考閱)하였다. 당시 퇴위해 원나라에 있었던 충선왕이 국내정치에 간섭하였는데, 이광봉(李光逢) 등과 연경(燕京)에 호종(扈從)하면서 권세를 부렸기 때문에 충숙왕과 틈이 생겼다.
충선왕이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토번(吐蕃)으로 귀양가자, 순군(巡軍)에 갇혔다가 1321년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풀려나와 보복으로 1322년에 충숙왕을 폐하고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세우려고 획책했으나 원나라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1324년 예천군(醴泉君)으로 봉해졌다.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 재상 · 국로들이 왕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할 것을 의론하였는데 이를 반대하였다.
관직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고, 예천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원나라의 명을 받아 태자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다. 시호는 문탄(文坦)이다. 저서로 『일재일고(一齋逸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