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3년(충선왕 5)에 충선왕이 왕위를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할 때 세자(世子)에 책봉되었으며, 이로부터 독로화(禿魯花: 인질)로서 원나라에 머물렀다. 1316년(충숙왕 3)에는 충선왕이 가지고 있던 심왕(瀋王) 왕위를 이어받고 원나라에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봉하여졌다. 이와 동시에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형인 양왕송산(梁王松山)의 딸과 결혼해 원황실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1320년에 원나라에서 영종(英宗)이 즉위하자 곧 그의 총애를 받았고 이를 기화(奇貨: 나쁘게 이용하는 기회)로 고려왕위를 엿보게 되었다. 때마침 고려에서 채홍철(蔡洪哲) · 권한공(權漢功) · 채하중(蔡河中) · 조적(曺頔) 등이 이를 부추겨 ‘심왕옹립운동(瀋王擁立運動)’이 일어났다.
다음 해에 이들의 참소(讒訴)로 충숙왕이 원나라에 불려가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억류당했으며, 이로부터 고려에서는 충숙왕을 지지하는 측과 심왕당(瀋王黨) 사이에서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3년에 원나라에서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泰定帝)가 즉위함으로써 충숙왕은 국왕인을 돌려받고 귀국했으며, 이 때 심왕을 옹립하려던 사람들이 처벌당하면서 심왕옹립운동은 잠잠해졌다.
이후 원나라에 머물다가 1333년(충숙왕 복위 2)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행궁(行宮)에서 왕을 알현하고 함께 고려에 돌아왔다. 1339년에 충숙왕이 사망하자 원나라의 태사(太師) 백안(伯顔)의 후원을 받으면서 조적 등과 모의해 또다시 고려왕위에 오르려 하였다.
이에 조적 등 심왕당이 충혜왕(忠惠王)의 왕궁을 습격하지만, 크게 패함으로써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344년(충혜왕 복위 5)에 고려로 돌아와 다음 해에 사망했고, 심왕위는 손자인 독타불화(篤朶不花)에게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