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강(平康). 몽고 이름은 하라티무르[哈刺帖木兒]. 채홍철(蔡洪哲)의 서자이다.
1319년(충숙왕 6) 호군(護軍)으로 있으면서 조적(曺頔)과 더불어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에게 아첨해 틈을 엿보아 왕위를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왕이 원나라에 가서 머무르게 되고, 국인(國印)을 거두게 되자 1321년 원나라의 사신 김가노(金家奴)와 함께 귀국해 원제(元帝)가 심양왕 왕고를 고려왕으로 책봉했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이 날 저녁 호군 이련(李璉)이 돌아와 국왕은 잘 있다고 전하자 재추(宰樞)가 비로소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해 9월 다시 원나라에 가서 심양왕을 시종하였다. 뒤에 원제가 왕에게 인장을 주어 환국하도록 하니 조적 등과 함께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무뢰배의 자제 2,000명에게 연명(連名)하게 하여 성(省)에 글을 올려 왕을 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342년(충혜왕 3) 조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철권(鐵券: 훈공을 기록한 서책)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여러 도의 직세(職稅)를 감면해 줄 것을 청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사공(司空) 강호례(姜好禮),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을보(鄭乙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상기(金上琦)·설현고(薛玄固), 밀직제학 장항(張沆) 등과 함께 국정에 참여했고, 뒤에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에 봉해졌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에 있으면서 다시 재상이 되기를 꾀하고 있는데, 마침 원나라가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기 위해 용사를 구하자, 고려에 응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고려에서는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장수와 병력 2,000명이 동원되었다.
1356년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다음 해 승(僧) 달선(達禪)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허위자백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거리에 내다가 목을 베었다.
밀직사(密直使),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정승(政丞), 영도첨의(領都僉議), 첨의정승(僉議政丞), 문하시중(門下侍中),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