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국대장공주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왕비.
이칭
인명
보탑실련(寶塔實憐)
작호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15년(충숙왕 2)
출생지
몽골
주요 관직
고려왕비
관련 사건
조비(趙妃)무고사건|충선왕 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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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계국대장공주는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왕비이다. 본명은 보탑실련(寶塔實憐)으로, 원(元) 진왕(晉王) 감말라[甘麻剌]의 딸이다. 충선왕과 불화하여 충선왕 폐위의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충렬왕과 충선왕의 갈등 상황 속에서 그 개가(改嫁)가 추진되기도 하였다. 1315년에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 제26대 충선왕의 왕비.
가계 및 인적 사항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이름은 보탑실련(寶塔實憐)이다. 할아버지는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장자 짐김[眞金]이며, 아버지는 진왕(晉王) 감말라[甘麻剌]이다. 동생은 원 진종(晋宗)이다. 1296년(충렬왕 22) 충선왕이 세자로 원에 있을 때 혼인하였고, 129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궁을 '중화궁(中和宮)'이라 하고 부를 '숭경부(崇敬府)'라 하였는데, 특히 숭경부는 좌우사윤(左右司尹)을 두어 장관 체제의 특혜를 누렸다. 1309년(충선왕 복위 2)에 원으로부터 한국장공주(韓國長公主)로 봉해졌다. 1315년(충숙왕 2) 원에서 사망하였다.

주요 활동

1297년(충렬왕 23) 충렬왕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줄 것을 원 세조에게 요청하였고, 이에 1298년 정월 세자와 공주가 연이어 귀국한 후 충선왕이 즉위하였다.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하기 이전에 이미 정비(靜妃) 왕씨, 순화원비(順和院妃) 홍씨, 조비(趙妃) 등의 부인들을 맞이하였고, 공주와 충선왕은 혼인 초부터 부부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공주와 충선왕의 불화가 조비와 그 모친이 둘의 사이를 저주한 데 따른 것이라는 익명서가 게시되었다. 이른바 ‘ 조비무고사건’이다. 조비의 아버지인 조인규(趙仁規)역관(譯官)으로 출세한 인물로, 세조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의 중요 세력이었다. 당시 고려는 충렬왕 세력과 충선왕 세력이 갈등하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은 충렬왕 세력이 충선왕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원 사신들이 고려와 원을 오가는 가운데, 충선왕이 즉위 후 단행한 관제 개편에 대해서도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즉위 한 해 8월, 충선왕은 폐위되어 원 황실의 케식[怯薛]으로 소환되었다. 공주도 이때 원으로 갔다.

복위한 충렬왕은 충선왕의 황실 부마 지위를 박탈하기 위하여 공주를 고려의 방계 종실인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과 다시 혼인시키려 하였고, 공주도 이에 적극 참여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1301년(충렬왕 27) 5월에 원에 가는 민훤(閔萱)에게 공주의 개가(改嫁), 즉 재혼을 청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때 충선왕을 총애한 황후 코코진[闊闊眞]이 사망한 것도 충렬왕과 그 지지 세력이 공주의 개가를 추진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훤은 이 표문을 제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 시도는 1303년(충렬왕 29)에 있었다. 당시 충렬왕은 직접 원으로 가서 전왕(前王) 즉 충선왕의 귀국을 저지하는 한편,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를 요청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원 성종(成宗) 테무르가 충렬왕의 입조(入朝)를 허락하지 않으므로 그대로 돌아왔다. 마지막 세 번째 시도는 1305년(충렬왕 31)에 충렬왕이 원의 입조 허락을 받고 원으로 가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충렬왕은 공주의 개가를 추진하기 위해 송린(宋璘) · 송방영(宋邦英) · 왕유소(王惟紹) 등을 대동하였다. 이들이 수행한다는 소식에, 충선왕 측에서도 원 승상(丞相) 탑랄한[塔剌罕]을 통해 황제에게 고하여 홍자번(洪子蕃) · 최유엄(崔有渰) 등이 충렬왕을 따라 원으로 가서 원 조정에서 공주의 개가 문제를 두고 정쟁을 벌이게 하였다. 특히 세 번째 시도는 공주가 자신의 거처인 지후사(祗候司)에서 충렬왕과 함께 공모하였다. 충렬왕의 측근 세력인 왕유소(王維紹) 등이 원 조정에서 서흥후 왕전에게 공주를 개가시키도록 청원하였으나 성사되지 않고, 오히려 충선왕 측에서 왕유소 등이 왕 부자 사이를 이간하였다는 죄목을 고하여 왕유소 등이 체포, 수감되기에 이르자, 공주는 고발장을 올린 신료들이 왕의 처소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개가 시도는 충선왕이 지지한 원나라 무종(武宗)이 황제위에 등극하면서 무산되었다.

1313년(충선왕 5)에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함께 고려로 귀국하였다. 이때 그녀는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서도 보지 못 할 정도로 융성한 대접을 받았다. 충선왕은 공주와 불화하였으니 몽골 황실 부마라는 지위의 정치적 중요성을 인지하여 그와 혼인을 유지하고 후대하였다. 충선왕이 이때 귀국한 것은 아들 충숙왕에게 양위한 후 아들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한 것으로, 충선왕은 이듬해인 1314년 다시 원으로 갔다. 공주는 1315년 원으로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였다. 1316년에 공주의 시신이 고려에 이르니, 영안궁(永安宮)에 빈소를 차려 두었다가 매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343년(충혜왕 복위 4)에 원에서 계국대장공주로 추봉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원사(元史)』

단행본

정용숙, 『고려시대의 후비』(민음사, 1992)

논문

김성준, 「여대 원공주 출신 왕비의 정치적 위치에 대하여: 특히 충선왕비를 중심으로」(『한국 여성 문화 논총』,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문화원, 1958)
김창현, 「충선왕의 탄생과 결혼, 그리고 정치」(『한국인물사연구』 14,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010)
김현라, 「원간섭기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의 위상 정립과 의미」(『지역과 역사』 39, 부경역사연구소, 2016)
김혜원, 「여원 왕실 통혼의 성립과 특징: 원공주 출신 왕비의 가계를 중심으로」(『이대사원』 24·25, 이대사학회, 1989)
이명미,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의 한 측면: 충렬~충선왕대 중조를 중심으로」(『동국사학』 54,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이정란, 「충렬왕대 계국대장공주의 개가운동」(『한국인물사연구』 9,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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