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사람으로 첨의중찬(僉議中贊) 조인규(趙仁規)의 딸이다.
몽고어 통역관으로 관로에 진출하여 원나라의 간섭기라는 국제관계 속에서 크게 성장하였으며, 딸을 충선왕에게 출가시켜 왕실의 후비를 배출한 가문으로서 그 위광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문적 위세로 인하여 정치적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 사건이 조비의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 저주사건이다.
궁 안에 붙여진 익명의 글에 “조인규의 처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그 딸을 사랑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공주가 조인규와 그 처를 옥에 가두고 이 사실을 원나라의 조정에 제소하여 원제(元帝)의 명으로 조인규와 조비, 아들과 사위를 원나라로 압송한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끝내 충선왕의 폐위와 충렬왕의 복위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고, 두 왕을 둘러싼 정치세력의 충돌이 야기되어 10여 년에 걸친 정쟁(政爭)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러한 정쟁은 충선왕이 원나라 무종(武宗)을 옹립하여 정치실권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종식되었고, 조씨일가의 위치도 복권되어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비의 생존 여부는 기록에 전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