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8년(충선왕 1)에 몽고인 왕비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충선왕의 다른 왕비인 조비(趙妃)를 시기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다고 무고함으로써 발단된 사건이다.
충선왕은 1295년(충렬왕 21)에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맞이하였다. 다음해에는 원나라에서 성종(成宗)의 질녀인 보탑실련(寶塔實憐)에게 장가들었는데, 이들이 각각 조비와 계국대장공주이다. 계국대장공주가 충선왕과 조비 사이를 시기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298년에 충선왕이 양위를 받아 즉위한 뒤 수개월 만인 그 해 5월 종신(從臣) 활활불화(闊闊不花)와 활활대(闊闊歹)를 원나라에 보내어 조비가 자기를 저주했음을 무고하였다. 이로써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의 불화가 원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충선왕은 관제개혁을 단행하고 조인규를 사도시중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수상에 임명하는 등 그 뒤 사림원(詞林院)을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준비하였다. 얼마 뒤에 사재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周)가 이번에는 조인규의 처가 자기 딸을 위해 공주를 저주했다는 내용의 글을 궁문(宮門)에 붙였다. 결국, 이로써 조인규와 그의 처, 그리고 아들 조서(趙瑞) · 조후(趙珝), 사위 박의(朴義) · 노영수(盧穎秀) 등이 하옥되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주는 종신 철리(徹理)를 원나라에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원나라에서는 조비를 순마소(巡馬所)에 가두도록 하는 한편, 홍중희(洪重喜) 등을 보내 와 조인규를 국문한 뒤 사위인 최충소(崔沖紹) · 박선(朴瑄)과 함께 원나라로 압송하였다. 이에 충선왕은 관제개혁을 거두었고, 그 해 8월 퇴위당하였다.
처음에는 계국대장공주의 충선왕과의 불화 또는 조비에 대한 시기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충선왕의 개혁정치를 좌절시키려는 국내의 정치세력 및 원나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사건은 충선왕 퇴위의 직접적인 구실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뒤 원나라의 고려에 대한 간섭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