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계보(季寶)이며 평양부(平壤府) 상원 출신이다. 충렬왕 때 자의 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막내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재경(司宰卿)으로 치사(致仕)한 조온려(趙溫呂)의 딸이다. 부인은 관군만호(管軍萬戶) 나유(羅裕)의 딸로, 통의군부인(通義郡夫人)에 봉해졌으며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다.
9세에 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창희궁(昌禧宮)의 권무(權務)가 된 뒤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310년(충선왕 2)에 밀직대언(密直代言)이 되었고, 1315년(충숙왕 2)에는 언부총랑(讞部摠郎)으로 임명되었다.
1338년(충숙왕 7)에 원나라의 사신 실리미(失里迷)가 황후책봉의 조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을 때 왕이 이를 몸소 맞이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는데, 이때 조위가 “왕이 병이 났다”고 해명하여 이를 무마하였다.
충숙왕이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와 알력이 있을 때 형인 조연(趙璉) · 조연수(趙延壽)와는 달리 심양왕을 돕지 않았다. 그러나 모함을 받아 원윤(元尹)의 직으로 있다가, 뒤에 누명이 벗겨져 1333년(충숙왕 복위 2) 지밀직(知密直)으로 특진되었다. 얼마 뒤 판밀직(判密直)으로 전보되었고, 이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승진되어 평양군(平壤君)에 봉하여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사사로이 방문객과 함께 국사(國事)를 비방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복주목사(福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조정의 재촉이 심하여 급히 부임하여 마침내 병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진봉(進奉)된 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장경(莊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