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선(義旋)이라고도 한다. 성은 조씨(趙氏), 본관은 평양(平壤). 호는 순암(順菴). 평양군(平壤君)조인규(趙仁規)의 넷째 아들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원혜(圓慧)의 법맥을 이었으며, 무외(無畏)의 유자(猶子)가 되어 원나라에 들어갔다. 원제(元帝)의 총애를 입어 정혜원통지견무애삼장법사(定慧圓通知見無碍三藏法師)의 법호를 받고 천원(天源)연성사(延聖寺) 주지로 있으면서 본국의 복국우세정명보조현오대사(福國祐世靜明普照玄悟大師)삼중대광자은군(三重大匡慈恩君)에 봉하여져 영원사(瑩原寺) 주지를 겸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원나라 왕경(王京)에서 병에 걸려 백방으로 치료하여도 아무런 효험이 나타나지 않자, 본국의 천태불은사(天台佛恩寺)에 와서 약사여래상 앞에 나아가 열심히 기도를 올리던 중 영단(靈丹)을 주는 신인(神人)을 현몽하고 고질병이 나았다. 이에 감동되어 장륙금신(丈六金身)의 불상과 두 보살상을 조성하고, 이어 대불전(大佛殿) 및 낭무(廊廡) 등을 건립하는 등 20여 년 동안 원나라와 본국을 왕래하면서 불은사를 크게 중수하였다.
혼기(混其)의 뒤를 이어 수원의 만의사(萬義寺)를 주관하면서 왕에게 사정을 계문(啓聞)하여 그 절을 묘련결사(妙蓮結社)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왕명에 따라 경사의 보은 광교사(光敎寺)를 주창하는 한편, 연성사의 자금으로 금나라 왕자 성(成)이 지은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을 중각(重刻), 유포하였으며, 뒤에 고려대장경에 넣게 하였다.
다시 원나라로 갔다가 1336년 본국에 돌아와 충숙왕에게 묘련사의 중수를 권하여 도량을 일신시켰다. 15년 동안 원나라 왕실과 본국의 왕실을 자유롭게 출입하는 당대의 고승이면서도 소인묵객(騷人墨客)들과 어울려 음풍영월(吟風咏月)을 즐기며 검소하고 평범하게 살았고, 글씨에도 능하였다.
특히, 대자(大字)를 잘 써서 자신의 거실인 허정당(虛淨堂), 계림부공관서루(鷄林府公館西樓)의 의풍루(倚風樓), 묘련사불전(妙蓮寺佛殿)의 편액 등을 남겼다. 또한, 묘련사의 두 개의 석지조(石池竈) 중 잃었던 한 개를 찾아내어 교분이 두터웠던 이제현(李齊賢)을 시켜 석지조기(石池竈記)를 짓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