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의 아들이다.
1270년(원종 11) 정조사(正朝使)로 몽고에 다녀온 뒤, 1274년(충렬왕 즉위년) 감찰잡단(監察雜端)이 되었고 1279년 감찰시승(監察侍丞)으로 시사(時事)를 직언하다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당하였다.
1287년 전법총랑 우부승지(典法摠郎右副承旨)가 되고, 부밀직사사 감찰대부(副密直司使監察大夫)·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거쳐 1293년 지밀직 전라도도지휘사(知密直全羅道都指揮使), 1297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온 뒤 판밀직사사가 되었다.
1307년 도첨의중찬 판전리감찰사사(都僉議中贊判典理監察司事)로서 등극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원나라의 고려 노비법 개정을 반대하고 이를 중지시킨 공으로 공신(功臣)이 되었다. 충렬왕이 세자(世子: 뒤의 충선왕)를 폐하고 서흥후 왕전(瑞興侯 王琠)을 후사로 책립하려 할 때 반대하여 왕의 뜻을 굽히게 하였다.
1309년(충선왕 1) 수첨의정승 감춘추관사대령군(守僉議政丞監春秋館事大寧君)·수충순의보리공신(輸忠順義輔理功臣)이 되었으며, 1324년(충숙왕 11) 수첨의정승 판선부사 대령부원군(守僉議政丞判選部事大寧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치사(致仕)한 뒤인 85세에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의 연경(燕京)에 가서, 고려를 원나라의 내지(內地)로 편입시키려는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의 일당 오잠(吳潛)·조적(曺頔) 등의 책동을 분쇄하고, 행성(行省)의 설치를 중지하게 하였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