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름은 나계도(羅啓道)였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恭愍王)이 그에게 선조인 문절공(文節公) 나인송(羅仁松)의 뜻을 이으라는 의미에서 계종(繼宗)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소문이 있어 15세 때인 1353년(공민왕 2)에 왕이 사서육경(四書六經) 1질을 하사하였다. 1360년(공민왕 9)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하였고, 2년 뒤에 홍언박(洪彦博)과 유숙(柳淑)이 주관한 과거에 박의중(朴宜中)·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을 시작으로 공민왕 말년까지 감찰사규정(監察司糾正), 사헌부시사(司憲府侍史), 소부소윤(小府少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때마다 항상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 진현관(進贒館) 등의 문한직(文翰職)을 겸하였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국초 이래의 천재지변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여 『천경록(天警錄)』이라는 책을 지었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는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현 경기도 고양시)으로 돌아갔다. 이후 우왕(禑王) 때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았다.
1390년(공양왕 2)에 좌상시(左常侍) 예문제학(藝文提學)으로 조정에 복귀하였으나 곧바로 병으로 물러났다.
그는 일찍이 『야사(野史)』를 저술하여 당시의 의문스러운 사건들을 직필로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당시의 간사한 무리들이 이를 알고 삭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1392년(공양왕 4)에 그가 집을 비운 틈을 타서 그의 집에 방화하여 기록을 태워 버렸다. 또한 사관(史官)에게 부탁하여 사서(史書) 가운데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곳은 모두 삭제해 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왕조가 개창하자 나계종(羅繼從)은 통곡을 하고 공민왕릉인 현릉(玄陵)을 참배하고서 나주(羅州)로 낙향하였다. 이후 권근(權近)이 직접 찾아와 벼슬길에 나설 것을 권유하였으나, 나계종은 백이(伯夷)의 고사를 들며 끝내 사양하였다.
전라남도 나주시 봉강사(鳳岡祠)에서 제향되고 있다.
저서로는 『죽헌유집(竹軒遺集)』 2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