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6년(고종 43) 희종의 능지기인 석릉직(碩陵直)이 되어 내시(內寺)에 적을 두었다. 충렬왕 때는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80년(충렬왕 6) 친교가 있던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庇)가 죽고 마침 자기 처도 죽자 김문비의 처와 간통하여 감찰사(監察司)와 중방(重房)의 탄핵을 받고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 뒤에 우승지(右承旨),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첨의참리(僉議叅理) 등을 거쳐 1297년(충렬왕 23) 찬성사(贊成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하였다가 퇴직하였다. 1301년(충렬왕 복위 3)에는 당시에 충렬왕과 충선왕(忠宣王)을 이간질하던 오잠(吳潛)의 비행을 원나라 사신에게 고발하기도 하였다.
1302년(충렬왕 복위4)에 다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로 기용되고 1305년(충렬왕 복위 7)에 우중찬(右中贊)을 거쳐 1310년(충선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다. 또한 충렬왕은 그에게 낙랑군(樂浪君)이라는 봉호를 내리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으로 삼았으며,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봉하고 관료를 두었다.
한편 김혼(金琿)은 충렬왕비이자 충선왕의 후궁이었던 숙비(淑妃) 김씨의 인척으로 그녀를 잘 모셨다고 한다. 특히 충선왕이 복위한 후에 남산서재(男山書齋)에서 잔치를 열어 충선왕과 숙비의 환심을 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실린 그의 열전에는 그가 “성품이 관후하고 온화하였으며 용모가 아름다웠고 예법에 익숙하였다.”라고 평가하면서도, 말년에 받은 관작은 숙비를 잘 모신 덕분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도 세운 공은 없었으며 의복과 음식 등이 사치스러웠다는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