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수복공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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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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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공민왕 때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이칭
이칭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성수복공신은 고려 후기 공민왕 때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이다. 1362년(공민왕 11)에 홍건적 10만여 명이 고려를 침입하여 11월에 개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듬해 정월에 고려군 20만여 명이 개경을 포위 공격하여 이들을 몰아내었다. 이때 공을 세운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안우경(安遇慶) 등을 1등 공신 53명과 2등 공신 53명으로 나누어 책봉하였다.

목차
정의
고려 후기 공민왕 때 홍건적의 제2차 침입을 물리치고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책봉된 공신.
내용

1361년(공민왕 10) 10월에 홍건적(紅巾賊)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1359년(공민왕 8) 12월의 첫 번째 침략에 이은 두 번째 침략이었다. 이때의 홍건적은 첫 번째에 비해 훨씬 대규모로, 반성(潘誠) · 사유(沙劉) · 관선생(關先生) · 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10만여 명의 대군이었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온 뒤 고려의 서북면 지역을 차례로 장악한 후, 그해 11월 24일에 개경을 함락하였다. 홍건적은 이후 개경을 장악한 수개월 동안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따르면 말과 소를 잡아 그 가죽을 펴서 성을 만들고 그 위에 물을 부어 얼려 사람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였고, 또한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여서 먹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한편 공민왕은 그 직전인 11월 19일에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 12월 15일에는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 도착하여 그곳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전열을 정비한 공민왕은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總兵官)에 임명해 반격에 나서게 했다. 1362년(공민왕 11) 정월에는 정세운의 지휘 하에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황상(黃裳), 한방신(韓方信), 이여경(李餘慶), 김득배(金得培), 안우경(安遇慶), 이귀수(李龜壽), 최영(崔瑩) 등이 병력 20만여 명을 이끌고 개경을 포위하였다. 마침 그때 눈과 비가 내렸는데 홍건적의 방비가 늦추어진 틈을 타서 공격하였고 홍건적을 격퇴하였다. 이 싸움에서 고려군은 홍건적의 우두머리 사유와 관선생 등 10만여 명의 목을 베고, 원나라 황제의 옥새(玉璽)와 금보(金寶), 각종 인장과 병장기 등의 물품을 노획했다. 또한 살아남은 홍건적 10만여 명은 압록강을 넘어 도망쳤다. 공민왕은 그해 2월 25일에 안동을 출발하여 상경길에 올랐다. 중간에 상주(尙州)에서 약 6개월, 청주(淸州)에서 약 4개월을 보낸 뒤, 이듬해인 1363년(공민왕 12) 2월에야 개경 근처의 흥왕사(興王寺)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이른바 흥왕사(興王寺)의 변란까지 겪은 후, 윤3월이 되어서야 개경으로 귀환하였다. 그리고 윤3월 15일에 경성수복공신을 책봉하였다. 경성수복공신은 수복경성공신(收復京城功臣)으로도 불리며 1등 공신과 2등 공신으로 구별되었다. 1등 공신 총 53명, 2등 공신 총 53명 등 전체 공신의 수는 106명에 달했다. 같은 날 공민왕은 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부시피난공신(扶侍避難功臣), 건의집병정난공신(建議集兵定難功臣), 신축호종공신(辛丑扈從功臣), 첨병보좌공신(僉兵輔佐功臣) 등도 함께 책봉했는데, 경성수복공신 106명은 신축호종공신, 즉 1361년에 국왕을 호종한 공로로 책봉한 공신 다음으로 많은 수였다. 이때의 공신에는 황상, 한방신, 안우경, 이순(李珣), 최영(崔瑩), 이귀수, 우제(禹磾) 등 실제 전투에 참여한 무장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우왕 때에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한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염흥방(廉興邦) 등도 명단에 포함되었고, 당시 29세였던 이성계(李成桂) 역시 1등 공신에 이름을 올렸다. 실제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총병관 정세운과, 3원수라고 불리던 안우 · 이방실 · 김득배는 전투 직후에 일어난 정세운 살해 사건과 관련하여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공신에 포함되지 못했다.

의의 및 평가

경성수복공신은 실제 군사력을 동원하여 전공을 세운 인물들이었으므로 이후 고려의 군권은 이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특히 안우경, 최영, 우제 등은 같은 날 흥왕토적공신으로 거듭 책봉되기도 하였다. 이들 공신의 권력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커져 가자 공민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신돈(辛旽)을 등용해 다수의 공신들을 숙청하였다. 한편 경성수복공신에 이성계와 그의 이복형인 이원계(李元桂), 조인벽(趙仁壁) 등 동북면(東北面) 세력이 이름을 올리면서 이들이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상기, 『고려시대사』(동국문화사, 1961)
Robinson, David, Empire's Twilight(Cambridge: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논문

이경희, 「고려말 홍건적의 침입과 안동임시수도의 대응」(『부산사학』24, 부산경남사학회, 1993)
민현구, 「신돈의 집권과 그 정치적 성격」(『역사학보』38·40, 역사학회, 1968)
박진훈, 「고려후기 홍건적의 침입과 안우의 군사활동」(『사학연구』130, 한국사학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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