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초에 누천하여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동북면병마사가 되고, 홍건적의 난에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되었다. 1360년(공민왕 9) 10월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여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원나라가 덕흥군(德興君)을 고려왕으로 세워 요양군사를 몰아 침입하여오자,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화주(和州)에 주둔하여 동북쪽을 방비하였다.
이 때 여진이 변방을 침략하므로 홀면병마사(忽面兵馬使) 전이도(全以道) 등을 보내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삼선(三善)·삼개(三介)의 무리가 쳐들어오자 함주(咸州)에서 전이도 등이 방어하였으나 패하였다. 이에 한방신이 화주로 진군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그러나 다시 휘하의 제장을 나누어 삼면으로 공격하여 대파하고 양주를 모두 수복하였다. 그 공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으며, 원나라에서는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秘書監丞)을 제수하였다.
뒤에 찬성사를 배하였으나 아들 한안(韓安)이 시역(弑逆)에 가담하였으므로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이 보낸 이영(李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