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탐진(耽津). 부계의 내력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1352년(공민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로서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최영(崔瑩) 등과 함께 평정하였다.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원나라에 보내는 방물(方物)과 함께 황후 탄생일을 축하하는 예물을 바치고 돌아왔다. 이어 전리판서(典理判書)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다.
1357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부만호(安州軍民萬戶府萬戶)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의 세력을 배후에 두고 세도를 부렸던 기철(奇轍)을 주살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의주(義州) · 정주(靜州: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 등지가 함락되자 서북면부원수(西北面副元帥)로서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적을 대파하였다. 또한 소수의 기병으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철주(鐵州: 지금의 함경북도 무산 지역으로 추정)에 이르러서 적을 크게 무찔렀다. 1359년에는 홍건적의 잔여 무리를 쫓아 고선주(古宣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 이르러 수백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 · 추충절의정란공신(推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다음 해 상원수(上元帥)가 되었고 재차 침입해 온 홍건적을 박주(博州: 지금의 평안북도 박천군) · 영변(寧邊: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군) 등지에서 대파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절령(岊嶺: 지금의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령)에서 패해 개성이 함락되었다. 1361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의 지휘 하에 이방실 · 김득배(金得培) · 이성계(李成桂) · 최영 · 안우경(安遇慶) 등 여러 장수와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전했다.
적을 거의 섬멸하고 나머지 적까지 추격해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 때 재상(宰相) 김용(金鏞)과 함께 전공을 세운 정세운을 시기해 죽였는데, 왕이 이 사실을 알고 장군들을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소환하자 그곳으로 가던 중 중문(中門)에서 김용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