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죽강(竹岡).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으로 권신 김용(金鏞) 등과 더불어 권행(權幸)을 다투던 친원파 인물이다.
1351년(공민왕 즉위년) 공민왕이 왕으로 지명되자 원나라로부터 왕을 호종하여 입국하였으며, 그 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1352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고 의성(義城) 덕천창 제조(德泉倉提調)를 겸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따랐던 수종공신들을 녹훈(錄勳: 훈공을 장부에 기록함)할 때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 등과 더불어 일등공신에 오르고 아울러 충근양절광보공신(忠勤亮節匡輔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뒤에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해졌다.
1354년(공민왕 3) 찬성사에 임명되어 지밀직사사 전보문(全普門)과 더불어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원나라에 드나들었다. 공민왕의 비호를 받고 김용과 권세를 다투면서 인사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러던 중 1355년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게 되자 김용은 복직을 봉쇄하기 위해 거짓 왕명을 꾸며 백관들로 하여금 부모상에 3년간 벼슬을 쉬도록 하는 법을 시행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이 3년상을 폐지, 다시 불러들여 첨의평리에 복관하고, 이어 중서문하시랑평장사판밀직(中書門下侍郎平章事判密直)에 임명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반원정치(反元政治)가 실시됨에 따라 부원배(附元輩)의 거두였던 기철(奇轍) 등이 제거되면서 함께 체포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신돈(辛旽)이 집권하면서 이춘부(李春富)와 함께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발탁되더니, 곧 이어 수시중(守侍中)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신돈과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같은 해 9월에 면직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