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7년(충렬왕 33)에 충선왕(忠宣王)이 원(元)나라에서 무종(武宗)을 옹립(擁立)한 공으로 다음해에 복위(復位)하였다. 1313년(충선왕 5)에 충선왕은 충숙왕(忠肅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다음해인 1314년(충숙왕 1)에 원나라의 연경(燕京: 北京)으로 가서 자신의 사제(私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웠다. 만권당은 충선왕이 원나라 인종(仁宗)이 황태자(皇太子)였던 시절에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있으면서, 원의 지식인들과 인적 교류했던 당시 인종의 궁사부(宮師府)라는 조직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었다.
일설에는 만권당의 이칭인 제미기덕통소개(濟美基德痛掃漑)가 몽골어와 티베트어를 음차(音借)한 어휘로서, ‘jimy-ig-tei’(입을 다물다), ‘tun’(명상하다), ‘suu-gai’(앉아 있다)는 고려식의 불교 참선방(參禪房)을 말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충선왕은 원나라 인종이 황제가 되기 전에 태자태사가 되었는데, 이 직책은 궁사부 소속으로 원의 인종이 만든 것이었다. 그는 그때 원나라의 관리와 인적 교류를 하였으며, 당시의 경험으로 만권당을 만들었다. 이 서재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곳에서 학문과 여러 사안에 대한 토론이 오고 갔던 점은 분명하며 그는 이곳에 많은 도서와 그림 등을 모아 놓았다. 남송(南宋) 출신의 유학자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당대의 명유(名儒)인 요수(姚燧) · 염복(閻復) · 조맹부(趙孟頫) · 장양호(張養浩) · 원명선(元明善) · 우집(虞集) · 소구(蕭㪺) · 홍혁(洪革) 등이 이 곳에 초대되어 학예(學藝)를 수련하였고, 고려의 학자로는 이제현(李齊賢)이 충선왕의 시종신(侍從臣)으로서 이들과 교유(交遊)하였다.
1320년(충숙왕 7)에 원의 인종이 서거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충선왕의 지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토번(吐蕃)으로 유배되기에 이르렀다. 만권당도 이때 자연히 없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만권당은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설치한 것으로, 이제현을 비롯한 고려의 학자들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던 남송 출신의 유학자이자 당대의 명유였던 사람들과 교유한 장소이다. 당시 이곳을 중심으로 고려와 원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특히 그곳에 모였던 남송의 학자들은 당시 남송에서 완성된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과 시(詩) · 서(書) · 화(畫)에 조예가 깊은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통해 이후 고려에 주자성리학이 보급되었고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와 같은 새로운 서화(書畫)의 기풍이 수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