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령전 ()

고려시대사
유적
고려시대,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
유적/건물
건립 시기
고려 전기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3칸
정면 너비
2,267㎝(가로, 동서)
측면 길이
1,015㎝(세로, 남북)
소재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내용 요약

경령전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고려시대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이다. 고려 원묘(原廟) 중의 하나로 태조·황고(太祖皇考)의 별묘(別廟)라고 불렸다. 태조와 국왕의 직계 4대친(부·조·증조·고조)의 진영을 봉안한 영전(影殿)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주고(奏告)와 부묘(祔廟)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사직·태묘와 같이 대사에 올라 있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와 단오·추석·중구일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
건립 경위

고려 주1 중의 하나로 태조(太祖) · 주2주3라고 불렸다. 태조와 현 국왕의 직계 4대친(부, 조, 증조, 고조)의 주4주5 주6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월 초하루, 단오, 추석, 주7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첫 기록은 1031년(덕종 즉위년) 6월에 사료에 나타난다. 이때 덕종(德宗)경령전(景靈殿)주8 왕위에 올랐음을 고하였다. 어느 시기에 건립되었는지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덕종의 선대(先代)인 현종(顯宗) 재위 시기(1010~1031)일 가능성이 높다. 거란(契丹)의 침략으로 1011년(현종 2)에 개경(開京)이 불타자 1014년(현종 5) 정월에 궁궐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020년과 1021년(현종 11~12)에 다시 주9. 비록 경령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경령전은 궁궐 중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0년(공양왕 2)에 정몽주(鄭夢周)가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에 임명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이다.

형태와 특징

태조와 현 국왕 직계 4대친의 진영을 봉안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안된 실례를 보면, 1261년(원종 2)에 고종(高宗)의 진영을 새로 봉안하면서 숙종(肅宗)의 진영을 옮겼으니, 예종(睿宗) · 인종(仁宗) · 강종(康宗) · 고종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원종(元宗)이 죽자 충렬왕(忠烈王)은 경령전에서 인종을 옮기고 원종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이때는 인종 · 명종(明宗) · 강종 · 고종이 봉안되어 있었다. 충렬왕 때에는 인종의 진영을 영통사(靈通寺)로 옮기고 원종의 진영을 경령전에 두었으니 태조와 충렬왕의 직계 4대인 명종 · 강종 · 고종 · 원종 등이 5실에 봉안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경령전에서 정월 초하루, 단오, 추석, 중구일에 왕이 친히 제향하는 의식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왕은 경령전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서향(西向) 재배하고 전(殿)에 올라 태조실(太祖室)에 나아가서 (태조실) 문[戶] 밖에서 또 재배한다. 이것이 끝나면 2실 문[戶]으로 해서 태조 앞에 나아가 재배한다. 태조실 의식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 제2실로 들어가 재배하고 제3, 4, 5실로 가서도 향을 올리고 주10. 경령전에 이르러 제일 먼저 ‘서향 재배’한다거나 2실로 해서 태조실로 출입하는 사실 등으로 볼 때 태조실과 2실은 서로 붙어 있으며, 2실 다음에 3 · 4 · 5실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즉 경령전 5실은 제일 좌측을 태조실로 하고 우측으로 2 · 3 · 4 · 5실의 구조인 것이다. 경령전의 제례에 은(銀) 주11를 사용하였으며, 제례 음식으로 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소찬(素饌)을 올렸다.

경령전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 그리고 현 국왕의 직계 조상이 모셔진 곳이므로 국왕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이곳에서 고하였다. 문종(文宗)의 경우 태자(太子)의 혼인 사실을 경령전에 고하였으며, 왕사(王師) 난원(爛圓)을 불러 경령전에서 왕자 왕후(王煦)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왕릉의 수리, 사신을 위한 연회 등을 고했으며, 불교 행사인 경행(經行)을 고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예지」에서 경령전에 관한 의례들을 살펴보면, 장수를 전쟁 지역으로 파견하는 의식,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왕의 맏아들을 낳았을 때 축하하는 의식, 왕태자를 책봉하는 의식, 왕태자의 칭호와 주22를 세우는 예식, 왕태자의 관례를 거행하는 의식 등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령전의 관직으로는 주14,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위숙군(圍宿軍)으로 경령전에 장교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령전 담장[屛障]에 장상 1명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담장으로 구분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에서 경령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궁궐 북쪽 내전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동당이실(同堂異室), 즉 건물 한 동과 그 안에 5실을 갖춘 주춧돌이 확인되었다. 기단(基壇)의 규모는 동서 길이 2,267㎝, 남북 길이 1,015㎝이다.

경령전은 주23를 봉안한 태묘(太廟)와 달리 진영을 봉안하였다. 태조를 주15로 하고, 국왕의 직계 4대 조상을 주16로 하여 봉안하였다. 제례(祭禮)는 태묘와 같은 주17였다. 진영을 봉안하고 제례에 소찬을 올린 것은 진전사원(眞殿寺院)의 불교식 제례와 유사함을 보여 준다.

경령전은 궁궐의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1989년 만월대(滿月臺) 발굴에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진 뒤로, 2007년 6월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에서 주18의 규모와 다수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다시 2008년 11월부터 2개월간 이루어진 정밀 발굴 결과 상당한 양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경령전에 해당하는 서북 건축군 서쪽 17건물지 건물 내부에서 5개의 예단(禮壇) 기초 시설이 확인되었다. 규모는 동서 2,267㎝, 남북 1,015㎝의 주19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건물 남편에는 3개의 문과 계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을 제외한 3면은 바깥쪽 초석열(礎石列)을 따라 벽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예단의 후벽과 양측 벽에 별도의 주20을 걸거나 벽화를 그리기 위한 시설을 하기 위한 용도로 파악된다.

의의 및 평가

고려는 태묘와 함께 원묘인 경령전을 두었다. 경령전은 왕조를 개창한 태조를 모신 곳이고, 현 국왕을 있게 한 직계 조상이 모셔진 곳이므로 국왕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 사직, 태묘와 같았고, 주고(奏告)와 주21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단행본

국립문화재연구소, 『개성 고려궁성 발굴조사보고서』(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논문

김철웅, 「고려 경령전의 설치와 운영」(『한국학』 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남창근·김태영, 「고려 본궐 경령전 일곽의 성격과 배치특성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연합논문집』 13, 대한건축학회지회연합회, 2011)
윤기엽, 「고려 경령전의 건립과 동향」(『한국사상과 문화』 69, 한국사상문화학회, 2013)
장동익, 「고려시대의 경령전」(『역사교육논집』 43, 역사교육학회, 2009)
홍영의, 「고려 궁궐내 경령전의 구조와 운용」(『한국학논총』 37,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주석
주1

본디의 종묘(宗廟). 우리말샘

주2

‘선고(남에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를 이르는 말.)’를 높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3

왕실에서 종묘에 들어갈 수 없는 사친(私親)의 신주를 모시던 사당. 조선 시대에는 임금의 생모가 정실 왕후가 아닐 때, 또는 임금으로 추존(追尊)되기 전에 따로 모신 사당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4

주로 얼굴을 그린 화상(畫像). 또는 얼굴을 찍은 사진. 우리말샘

주5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시다. 우리말샘

주6

임금의 초상을 모신 전각. 우리말샘

주7

세시 명절의 하나로 음력 9월 9일을 이르는 말. 이날 남자들은 시를 짓고 각 가정에서는 국화전을 만들어 먹고 놀았다. 우리말샘

주8

지위가 높거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가 뵈다. 우리말샘

주9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10

제사에서, 술을 부어 신위(神位) 앞에 드리다. 우리말샘

주11

제사에 쓰는 그릇. 놋그릇, 사기그릇, 나무 그릇이 있다. 우리말샘

주14

고려 시대에, 삼사(三司)ㆍ춘추관ㆍ경연(經筵)ㆍ전의시(典儀寺)ㆍ사복시ㆍ선공사 따위의 으뜸 벼슬. 정일품이나 정이품의 재신(宰臣)이 겸하였다. 우리말샘

주15

세대가 지나도 다른 장소로 옮기지 않는 신위.

주16

세대가 지나면 다른 장소로 옮겨야 하는 신위.

주17

통일 신라ㆍ고려ㆍ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제사. 통일 신라는 나력(奈歷)ㆍ골화(骨火)ㆍ혈례(穴禮), 고려는 환구단ㆍ방택ㆍ사직단에서, 조선은 종묘ㆍ영녕전ㆍ사직단에서 지냈다. 우리말샘

주18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 우리말샘

주19

내각(內角)이 모두 직각인 사각형. 주로 정사각형이 아닌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0

임금의 화상(畫像)이나 사진. 우리말샘

주21

삼년상이 지난 뒤에 그 신주를 종묘에 모심. 우리말샘

주22

고려 시대에 둔, 지방 행정 구역 단위의 하나. 목(牧) 아래, 군(郡)의 위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주23

죽은 사람의 위패. 대개 밤나무로 만드는데, 길이는 여덟 치, 폭은 두 치가량이고,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생겼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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