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령전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만월동 고려 궁궐 내에 있던 고려시대 태조와 국왕 4대친(四代親)의 진영을 봉안한 전각이다. 고려 원묘(原廟) 중의 하나로 태조·황고(太祖皇考)의 별묘(別廟)라고 불렸다. 태조와 국왕의 직계 4대친(부·조·증조·고조)의 진영을 봉안한 영전(影殿)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주고(奏告)와 부묘(祔廟)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사직·태묘와 같이 대사에 올라 있었다. 매년 정월 초하루와 단오·추석·중구일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고려 원묘(原廟) 중의 하나로 태조(太祖) · 황고(皇考)의 별묘(別廟)라고 불렸다. 태조와 현 국왕의 직계 4대친(부, 조, 증조, 고조)의 진영을 봉안한 영전(影殿)으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월 초하루, 단오, 추석, 중구일(重九日)에 국왕이 친히 제사하였다.
첫 기록은 1031년(덕종 즉위년) 6월에 사료에 나타난다. 이때 덕종(德宗)은 경령전(景靈殿)을 배알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고하였다. 어느 시기에 건립되었는지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덕종의 선대(先代)인 현종(顯宗) 재위 시기(10101031)일 가능성이 높다. 거란(契丹)의 침략으로 1011년(현종 2)에 개경(開京)이 불타자 1014년(현종 5) 정월에 궁궐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020년과 1021년(현종 1112)에 다시 중수하였다. 비록 경령전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경령전은 궁궐 중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1390년(공양왕 2)에 정몽주(鄭夢周)가 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에 임명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 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이다.
태조와 현 국왕 직계 4대친의 진영을 봉안한 5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봉안된 실례를 보면, 1261년(원종 2)에 고종(高宗)의 진영을 새로 봉안하면서 숙종(肅宗)의 진영을 옮겼으니, 예종(睿宗) · 인종(仁宗) · 강종(康宗) · 고종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원종(元宗)이 죽자 충렬왕(忠烈王)은 경령전에서 인종을 옮기고 원종을 봉안하였다. 따라서 이때는 인종 · 명종(明宗) · 강종 · 고종이 봉안되어 있었다. 충렬왕 때에는 인종의 진영을 영통사(靈通寺)로 옮기고 원종의 진영을 경령전에 두었으니 태조와 충렬왕의 직계 4대인 명종 · 강종 · 고종 · 원종 등이 5실에 봉안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에 '경령전에서 정월 초하루, 단오, 추석, 중구일에 왕이 친히 제향하는 의식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국왕은 경령전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서향(西向) 재배하고 전(殿)에 올라 태조실(太祖室)에 나아가서 (태조실) 문[戶] 밖에서 또 재배한다. 이것이 끝나면 2실 문[戶]으로 해서 태조 앞에 나아가 재배한다. 태조실 의식을 마친 후 그 다음으로 제2실로 들어가 재배하고 제3, 4, 5실로 가서도 향을 올리고 작헌(酌獻)한다. 경령전에 이르러 제일 먼저 ‘서향 재배’한다거나 2실로 해서 태조실로 출입하는 사실 등으로 볼 때 태조실과 2실은 서로 붙어 있으며, 2실 다음에 3 · 4 · 5실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즉 경령전 5실은 제일 좌측을 태조실로 하고 우측으로 2 · 3 · 4 · 5실의 구조인 것이다. 경령전의 제례에 은(銀) 제기를 사용하였으며, 제례 음식으로 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소찬(素饌)을 올렸다.
경령전은 고려를 개창한 태조, 그리고 현 국왕의 직계 조상이 모셔진 곳이므로 국왕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이곳에서 고하였다. 문종(文宗)의 경우 태자(太子)의 혼인 사실을 경령전에 고하였으며, 왕사(王師) 난원(爛圓)을 불러 경령전에서 왕자 왕후(王煦)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왕릉의 수리, 사신을 위한 연회 등을 고했으며, 불교 행사인 경행(經行)을 고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예지」에서 경령전에 관한 의례들을 살펴보면, 장수를 전쟁 지역으로 파견하는 의식,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 왕의 맏아들을 낳았을 때 축하하는 의식, 왕태자를 책봉하는 의식, 왕태자의 칭호와 부(府)를 세우는 예식, 왕태자의 관례를 거행하는 의식 등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경령전의 관직으로는 영사(領事), 사(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등이 있었다. 그리고 위숙군(圍宿軍)으로 경령전에 장교 1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경령전 담장[屛障]에 장상 1명이 배치된 것으로 보아 담장으로 구분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 조사에서 경령전으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궁궐 북쪽 내전 구역에서 발굴되었다. 동당이실(同堂異室), 즉 건물 한 동과 그 안에 5실을 갖춘 주춧돌이 확인되었다. 기단(基壇)의 규모는 동서 길이 2,267㎝, 남북 길이 1,015㎝이다.
경령전은 신주(神主)를 봉안한 태묘(太廟)와 달리 진영을 봉안하였다. 태조를 불천위(不遷位)로 하고, 국왕의 직계 4대 조상을 체천위(遞遷位)로 하여 봉안하였다. 제례(祭禮)는 태묘와 같은 대사(大祀)였다. 진영을 봉안하고 제례에 소찬을 올린 것은 진전사원(眞殿寺院)의 불교식 제례와 유사함을 보여 준다.
경령전은 궁궐의 서북쪽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1989년 만월대(滿月臺) 발굴에서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진 뒤로, 2007년 6월 개성 만월대 남북 공동 발굴 조사에서 유구의 규모와 다수의 유물이 수습되었고, 다시 2008년 11월부터 2개월간 이루어진 정밀 발굴 결과 상당한 양의 유물이 수습되었다. 경령전에 해당하는 서북 건축군 서쪽 17건물지 건물 내부에서 5개의 예단(禮壇) 기초 시설이 확인되었다. 규모는 동서 2,267㎝, 남북 1,015㎝의 장방형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건물 남편에는 3개의 문과 계단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편을 제외한 3면은 바깥쪽 초석열(礎石列)을 따라 벽을 쌓아 올렸는데, 이는 예단의 후벽과 양측 벽에 별도의 어진(御眞)을 걸거나 벽화를 그리기 위한 시설을 하기 위한 용도로 파악된다.
고려는 태묘와 함께 원묘인 경령전을 두었다. 경령전은 왕조를 개창한 태조를 모신 곳이고, 현 국왕을 있게 한 직계 조상이 모셔진 곳이므로 국왕에게 있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국왕은 나라와 왕실의 중요 행사를 경령전에 고하였다. 의례의 위상은 원구, 사직, 태묘와 같았고, 주고(奏告)와 부묘(祔廟) 의례는 태묘 의례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