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경행(街衢經行)’이라고도 한다. 고려 초기인 1046년(정종 12) 이 행사가 처음으로 행하여졌으며, 그 뒤로는 연중행사로 되었다. 경행은 걸으면서 경전을 독송하는 의식으로, 큰 법회가 있을 때 법사를 앞세우고 경문을 외면서 부처님의 주위를 우측으로부터 여러 번 계속해서 도는, 전통적인 사원 내의 의식이었다.
당나라 정토교의 대사 선도(善導)의 『전경행도원왕생정토법사찬(轉經行道願往生淨土法事讚)』의 경행설명에서는 전경(轉經)과 행도(行道)를 중심으로 한 의식으로, 경행의 앞뒤로는 봉청(奉淸)·발원·참회·주원(呪願) 등의 의식이 행하여진다고 하여, 경행의 기복적인 성격을 말하고 있다.
고려 정종 때 처음으로 행하여졌던 경행의식은 그 때 대궐에서 시중이었던 최제안(崔齊顔)이 왕을 대신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공양한 뒤, 대중을 세 패로 나누어서 개경 시내를 돌았다. 그때 각 무리마다 『인왕경』을 모셔놓은 가마를 행렬의 맨 앞에 메고 돌았는데, 가마는 여러 가지 예쁜 빛깔로 단장을 화려하게 하였고, 그 뒤에는 법복의 장엄한 승려들이 걸어가면서 『인왕경』을 외었다. 승려의 행렬 뒤에는 관복을 입은 관원들이 따랐다.
이 행사에서 『인왕경』이 중시되었던 것은 경전에 국왕이 망령된 잡귀를 쫓아 뜻대로 국토를 수호하려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재지변으로 인한 질병·화재·가뭄과 그 밖의 모든 고통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외적의 침범을 방어하고 국토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하루에 두 번씩 이 경을 외어야 할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에 근거를 두고 가뭄이 심하였던 1106년(예종 1) 6월개경의 시민들이 중심이 되어 경행불사(經行佛事)를 한 결과 때마침 비가 내렸고, 왕은 몹시 기뻐한 나머지 많은 하사품을 내리고 계속해서 거리를 걸으면서 경을 외도록 권장하였다. 조선시대 이후 오늘날의 경행은 고려 때와는 달리, 주로 사원 내의 염불과 행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행도는 본존불 또는 탑의 주위를 돌면서 공경과 존경의 마음을 지니게 하는 의식으로서, 탑돌이나 요불이 곧 그것이다. 그 주위를 도는 의식은 십바라밀정진(十波羅蜜精進)이라고 하는 의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십바라밀정진도에 의하면 공경과 존경의 마음 외에도 수행의 방법을 겸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존경의 의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