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위 기간은 1170년∼1197년이다. 이름은 왕호(王晧), 초명은 왕흔(王昕), 자는 지단(之旦)이다. 인종(仁宗)의 셋째 아들이며 의종(毅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강릉공(江陵公) 왕온(王溫)의 딸인 의정왕후(義靜王后)로, 강종(康宗)이 즉위하여 광정태후(光靖太后)라 하였다.
1148년(의종 2)에 익양후(翼陽侯)로 봉해졌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 등이 일으킨 무신정변에 의하여 의종이 폐위되고 추대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곧 수문전(修文殿)에 나아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고(李高)를 대장군(大將軍) · 위위경(衛尉卿)으로,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 · 전중감(殿中監)으로 임명하는 등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여 기용하였다. 또 문관직과 무관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등의 의중에 따라 관직을 임명하였다.
1171년(명종 1) 양광(楊廣) · 충청주도(忠淸州道)와 경상(慶尙) · 진합주도(晉陜州道)를 각각 2도로 구분하였다. 1173년(명종 3)에 원자(元子) 왕도(王瓙: 훗날의 강종(康宗))를 세워 태자를 삼고, 56현에 각각 감무(監務)를 두었다. 같은 해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정중부와 이의방의 타도와 전왕(前王)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중부와 이의방 등에 의해 평정되고 의종은 경주에서 이의민(李義旼)에 의해 살해되었다. 3경(京) ·4대도호부(大都護府) ·8목(牧)으로부터 군(郡) · 현(縣) · 역(驛) · 관(館)에 이르기까지 무신의 등용을 허락하여 지방관까지도 무신이 장악하게 되었다.
1174년(명종 4)에 지리도참설(地理圖讖說)에 의해 좌소 백악산(左蘇白岳山)과 우소 백마산(右蘇白馬山) · 북소 기달산(北蘇 箕達山)에 연기궁궐(延基宮闕)을 두기로 하고 그 조성관(造成官)을 두었다. 이해에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윤인첨(尹麟瞻)을 원수(元帥), 기탁성(奇卓誠)을 부원수로 삼아 서경을 평정하였다.
1175년(명종 5)에 영양(英陽: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등 10현에 감무를 두었으며, 1178년(명종 8)에 찰방사(察訪使)를 각 도(道)에 파견하여 백성들의 고통과 지방관들의 근무 태도를 살피게 하였다. 또한 1월 15일에 행하던 연등회(燃燈會)를 옛 제도에 따라 2월 15일로 환원하였다. 1182년(명종 12)에 민란이 일어난 관성현(管城縣: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과 부성현(富城縣: 지금의 충청남도 서산)을 폐지하였다. 1186년(명종 16)에 장군 차약송(車若松) 등 무관 43인을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에 겸속(傔屬)시켰다. 무신의 겸속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것으로 무신은 왕의 근시직(近侍職)까지도 차지하게 되었다. 그해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합주도를 합쳐 경상주도로 삼았다.
1188년(명종 18)에 양계병마사(兩界兵馬使)와 오도안찰사(五道按察使)로 하여금 지방을 순찰하여 지방관들의 행정 실태를 살피게 하였다. 1192년(명종 22)에 유밀(油蜜)이 귀해져 공사의 연회에 유밀과(油蜜果)의 사용을 금하였다. 1195년(명종 25)에 오래 묵은 빚을 면하게 하여 민생의 괴로움을 덜어 주려 하였고, 상주에 공검대제(恭儉大堤)를 축조하여 권농에 힘쓰기도 하였다. 1196년(명종 26)에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자 이듬해 1197년(명종 27)에 최충헌에 의하여 폐위당하였다.
1170년 무신정변에 의하여 왕위에 오른 이후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이 차례로 집권하는 정치적 격변 속에서 왕위를 유지하였지만, 결국 최충헌의 집권으로 폐위된 셈이다. 26년 재위 기간은 무신정권하에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어지러웠던 시대이기도 하였다. 서북지역의 민란으로부터 공주 명학소(鳴鶴所), 전주 군인과 관노(官奴)의 난 등이 그것이다. 최충헌 집권 이후의 폐위는 이러한 정치적 혼란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었고, 그에 의하여 최충헌의 집권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호는 광효(光孝)이며, 능은 지릉(知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