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광(靈光). 의종 때의 정치와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인물이었다.
무신정권이 성립된 직후 1171년(명종 1) 우간의(右諫議)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좌간의 김신윤(金莘尹),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이소응(李紹膺), 좌사간(左司諫) 이응초(李應招), 우정언(右正言) 최당(崔讜) 등과 더불어 의종 때 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던 재상 최윤의(崔允儀), 간의 이원응(李元膺), 중승(中丞) 오중정(吳中正) 등과 대성(臺省)의 관직을 겸임하고 있던 이준의(李俊儀)·문극겸(文克謙)을 탄핵하였다. 이는 전대에 붕괴된 정치질서를 회복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관료기구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준의는 술을 마시고 순검군(巡檢軍)을 시켜 간관을 욕보이게 하였다. 명종은 이준의를 위로하고자 간관을 가두고 김신윤을 판대부사(判大府事), 김보당을 공부시랑으로 좌천시켰다. 이로 인해 명종에 대한 불신과 집권무신에 대한 반감이 생기게 되었으며, 중앙의 정치무대에서 축출되어 간의대부로 동북면병마사로 나가게 되었다.
1173년(명종 3) 이에 불만을 품고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 명분은 집권자인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을 몰아내고 전 왕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장순석(張純錫)과 모의해 장순석과 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로 삼아 의종을 호종하게 하고, 배윤재(裵允材)를 서해도병마사로 삼아 군사를 일으키게 하니 동북면지병마사 한언국(韓彦國)도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였다.
조정에서는 북계의 군대를 풀어 한언국을 죽이고 김보당을 체포하는 한편, 장군 이의민(李義旼),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남로로 나아가게 하고, 또 군사를 서해도에 보내어 반군을 완전히 진압하였다. 죽을 즈음에 이 일에 모든 문신들이 가담하였다고 말해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