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7년(의종 1) 7월 우사간을 지냈고, 1151년 5월에는 기거주(起居注)로서 폐신(嬖臣) 김존중(金存中)과 결탁하여 외척 정서(鄭敍)를 동래로 유배 보냈다.
김존중 및 환관 정함(鄭諴)과 함께 왕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부렸으며, 1156년에는 낭장 최숙청(崔淑淸)이 이들을 살해하려다 발각되어 유배되는 사건이 있었다.
1154년 4월 우승선으로 국자시(國子試)를, 1156년 6월에는 동지공거로서 예부시(禮部試)를 주관하였다. 1157년 11월 좌승선 직문하성(左承宣直門下省)으로 왕이 정함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제수하려 하자 반대하였으나, 왕의 간청으로 그 고신(告身)에 서명하였다.
1158년 9월 지주사(知奏事)로서 배주(白州)에 별궁(別宮) 짓는 일로 파견되었으며, 추밀원부사에 올랐고, 1160년 4월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제수되었으나 바로 그날 죽었다. 1171년(명종 1) 9월 일찍이 환관 정함의 고신에 서명하였던 일로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 자손을 금고(禁錮)하는 조치가 취하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