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173년(명종 3)에 무신집권에 저항하는 반무신란(反武臣亂)의 하나인 김보당(金甫當)의 난이 일어났다. 김보당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장순석(張純錫)과 유인준(柳寅俊)을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 임명하여 당시 거제(巨濟: 현재 경남 거제시)에 유폐되어 있었던 의종을 모시고 계림(鷄林: 현재 경북 경주시)으로 가서 머물게 했다. 이때 무신집권자인 이의방(李義方)이 장군 이의민(李義旼)과 함께 산원(散員) 박존위(朴存威)를 남도 지역으로 파견하여 이를 평정케 하였다.
경주에 도착한 이의민·박존위 일행이 경주인들을 회유, 포섭하여 경주인들로 하여금 장순석 세력을 공격해서 수백 명을 죽이고 의종을 가두게 하였다. 장순석 세력을 제압한 경주인들의 인도를 받아 성으로 들어온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끌어내어 몸소 의종의 척추를 꺾어 시해하였다. 의종이 시해되자 박존위는 의종의 시신을 이불에 싸서 가마솥 두 개에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졌다.
김보당의 난이 진압된 후 박존위는 이의방정권 하에서 장군(將軍)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서경(西京)에서 반무신란 농민항쟁 성격을 지닌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발발하자 조위총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운중도(雲中道)에 파견되었다. 이때 박존위가 의종의 시신을 가마솥에 넣어 곤원사 연못에 던진 일을 자랑하고 다니자, 운중도 사람들이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에게 호응하여 박존위를 살해하였다.
박존위가 관여한 의종시해사건의 전말이 차후 드러남으로써 초기 무신정권의 도덕성과 정통성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결국 이의방정권의 몰락에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