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216년(고종 3)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까지 거란유종(契丹遺種: 패망한 大遼收國의 거란족 유민)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1216년 거란유종은 압록강을 건너 영삭진(寧朔鎭)과 정융진(定戎鎭)에 대한 침략을 시작으로, 의주(義州)·정주(靜州)·삭주(朔州)·창주(昌州)·운주(雲州)·연주(燕州) 등을 난입하였다. 당시 삭주분도장군(朔州分道將軍) 노인수(盧仁綏)와 창주분도장군(昌州分道將軍) 차덕위(車德威)가 이들을 막지 못하자 관직을 삭탈하고 중랑장(中郞將) 이희주(李希柱)와 김공석(金公奭)을 차장군(借將軍)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차장군 이희주는 초기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북상하였다. 이후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북상하던 고려 삼군이 1217년(고종 4) 3월에 태조탄(太祖灘: 평안북도 박천군에 있는 강)에서 비를 만나 행군을 멈추고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이 틈을 타서 거란유종의 대군이 고려군을 기습함으로써 크게 패하였다. 태조탄전투에서 이희주는 대장군(大將軍) 이의유(李義儒)·백수정(白守貞) 등과 함께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