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태조(太祖) 때의 공신(功臣) 최준옹(崔俊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최유청(崔惟淸)이다.
1171년(명종 1) 우정언(右正言)으로 승선(承宣)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文克謙)의 대성(臺省) 겸관(兼管)을 사면(辭免)하게 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좌천되었다. 이어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을 거쳐 1183년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주관하여 오몽림(吳夢霖)·김우(金瑀) 등을 뽑았다.
1197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知貢擧: 고려시대 과거시험관)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민공규(閔公珪)와 함께 진사(進士) 방연보(房衍寶) 등 30인을 뽑았다. 신종(神宗) 때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고, 1199년(신종 2)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로 치사(致仕)하였다.
쌍명재(雙明齋)를 설치하였고, 최선(崔詵)·장자목(張自牧)·고영중(高瑩中)·백광신(白光臣)·이준창(李俊昌)·현덕수(玄德守)·이세장(李世長)·조통(趙通) 등과 함께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시와 술로써 소일하니 당시에 지상선(地上仙)으로 불렸다.
시호는 정안(靖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