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중승 또는 사헌중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995년(성종 14) 어사대의 설치와 함께 처음 두어졌으며, 1014년(현종 5) 어사대가 금오대(金吾臺)로 개편될 때 폐지되었다가 다음해에 사헌대로 고쳐지면서 다시 두어졌다.
1023년에는 사헌대가 어사대로 환원되자 그 속관으로 존속하였으며, 문종 때에 이르러 종4품, 정원 1인의 관직으로 정비되었다. 이후 1275년(충렬왕 1) 어사대가 감찰사(監察司)로 개편됨과 동시에 시승(侍丞 : 監察侍丞)으로 고쳐졌으며, 1298년에는 감찰사가 사헌부로 개편되자 다시 두어졌는데, 이 때 품계는 종3품으로 오르고 정원도 2인으로 늘어났다.
같은 해 사헌부가 감찰사로 되돌려지는 변화가 있었지만 감찰사의 속관으로 남아 있다가 1308년에 다시 사헌부가 들어서면서 정3품, 정원 2인의 집의(執義)로 개칭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 문종관제가 복구되면서 어사대가 복치됨과 동시에 종3품, 정원 1인의 관직으로 다시 두어졌으나, 1362년 어사대가 감찰사로 개편되면서 중승은 다시 집의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건국 직후인 1392년(태조 1) 사헌부의 정3품 관직으로 중승·겸중승(兼中丞)이 각 1인씩 두어졌다가 1401년(태종 1) 관제개혁에서 집의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