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지기(志氣)가 있고 강하고 과감하여 주로 전공을 통하여 입신하였다. 1012년(현종 3) 5월에 동여진(東女眞)이 영일(迎日) · 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 · 이인택(李仁澤) · 조자기(曺子奇) 등과 함께 안찰사로서 주군병(州郡兵)을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으며,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하자 대장군으로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다시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1019년에 응양상장군주국이 되고, 곧 이어 우산기상시에 올라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죽은 뒤에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강민첨의 공로로 아들 강단(姜旦)에게도 녹자(祿資)를 가하였다.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