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 때 처음 설치되어 병과(丙科)·권무(權務) 2인을 녹사로 하고, 이속으로는 기사(記事) 4인, 기관(記官) 1인을 두었다.
설치 목적은 각 품계에 따른 관리의 전시과(田柴科) 절급을 위한 것이었으나, 무신란 이후 권신의 발호와 지방세력의 대두로 과전이 붕괴되고, 대토지소유가 진행됨에 따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점차 국가에 조세를 바쳐야 할 공전이 사전화되어 가고, 더욱이 몽고의 침입으로 국고가 고갈되어 백관에 지급할 녹봉의 지급마저 불가능하게 되자, 강도시대(江都時代)인 1257년(고종 44) 다시 설치해 관리에게 줄 녹봉을 해결하였다.
즉, 전토를 분급해 녹봉미에 대신하도록 하며, 강화도 내의 전토 가운데 공전에 속한 2천결(結)과 권신 최의(崔竩)에게 속한 3천결을 제외한 나머지를 제왕(諸王), 재상 이하 백관에게 녹과전으로 분급하였다. 그러나 당시 비옥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던 권문세가의 반대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으며, 실제로 환도 이후 녹과전은 경기팔현(京畿八縣)으로 충당되었다.
이처럼 관할하는 토지의 영역이 기현전(畿縣田)으로 축소되자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의 개혁 때, 경기의 지방행정을 관할하고 있던 개성부에 병합되었다. 그 뒤 1388년(창왕 즉위년) 10월 다시 복구되고, 1390년(공양왕 2)에는 처음으로 각 품의 전적(田籍)을 반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관원(外官員)·향역리(鄕驛吏)·진척(津尺)·원주(院主)의 전수(田數) 및 풍저창(豐儲倉)·광흥창(廣興倉)의 납세의 수를 정할 것을 상계(上啓)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능이 활발하여지기도 전인 1392년 조선 건국의 준비단계로 실시된 관제개혁 때 호조에 병합됨으로써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