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1년(숙종 6)『도선비기(道詵祕記)』에 의거, 도읍을 남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한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 김위제(金謂磾)의 ‘남경건도의(南京建都議)’를 계기로 설치된 관청이다.
그런데 당시 김위제가 이러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은 숙종(肅宗)이 권신 이자의(李資義) 일족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카인 헌종(獻宗)의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마침 이 해에 남경 부근에 심한 서리와 우박이 내리자 이는 정변에 따른 찬탈과 살육에 대한 하늘의 응징이라는 생각에서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남경창건을 주장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남경은 그 지리적 · 역사적인 중요성으로 주목을 받아온 곳이며, 이미 문종 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라는 지리도참서에 의하여 남경에 장원정(長源亭)을 지어 서경의 좌우궐(左右闕)과 함께 순어지소(巡御之所)로 삼았다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중지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남경개창도감의 설치와 함께 활발해진 남경사업을 위하여 왕은 최사추(崔思諏) · 윤관(尹瓘) · 문상(文象) · 음덕전(陰德全) 등을 양주에 파견하여 궁궐터로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게 하였다. 이리하여 1104년 5월에 지금의 서울과 비슷한 지역에 남경궁(南京宮)을 낙성하였다.
그 규모는 동은 대봉(大峰 : 지금의 駱山), 서는 기봉(岐峰 : 지금의 鞍山), 북은 북악(北岳), 남은 지금의 신용산(新龍山)의 남쪽 끝까지 걸쳐 있었다. 그리고 궁성도 쌓은 것은 확실하나 도성(都城)의 존재여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