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무신정변을 주도하였던 이의방(李義方)의 형이다.
무신정변 직후인 1170년(의종 24) 승선(承宣)에 초수(超授)되었으며, 같은 해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곧 좌승선급사중(左承宣給事中)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에 간관들이 그 겸직의 부당함을 들어 간쟁하자 순검군(巡檢軍)을 시켜 간관들을 능욕하였으며, 결국 급사중에서 위위소경(衛尉少卿)으로 옮기게 되었으나 간관들도 모두 좌천되었다.
이의방의 세력에 의지하여 횡포를 부렸으며, 1172년(명종 2) 전국의 53개 속현에 감무를 파견할 것 등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다음 해에는 이의방·정중부(鄭仲夫) 등이 김보당(金甫當)의 난을 진압한 뒤 김보당에 연루된 문신들을 대거 주륙하자 이의방을 설득하여 이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1174년 귀법사(歸法寺)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압하고 귀법사와 중광사(重光寺)·홍호사(弘護寺)·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 등을 불태우려 하자 이를 말리려다 이의방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해에 정균(鄭筠)이 이의방을 제거할 때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