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무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속군현(屬郡縣)에 파견된 지방 관직.
이칭
이칭
안집별감
제도/관직
설치 시기
1106년(고려 예종 1)
폐지 시기
1413년(조선 태종 13)
소속
속군현
내용 요약

감무(監務)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속군현(屬郡縣)에 파견된 지방 관직이다. 유민의 안집과 권농, 조세 수취, 향리를 감독하는 등 부임한 군현의 지방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감무는 1106년(예종 1)부터 시작하여 인종 대, 명종 대에 걸쳐 대규모로 파견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 안집별감(安集別監)이라 고쳤다가 1388년(창왕 즉위년)에 다시 현령 · 감무로 바꾸었다. 공양왕 때에는 조선 건국 세력이 군현제를 정비하는 작업의 하나로 감무를 새로 설치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현감으로 개칭하였다.

정의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 속군현(屬郡縣)에 파견된 지방 관직.
설치 목적

고려시대 지방 군현 중에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과 속현(屬縣)이 다수 있었다. 1106년(예종 1)부터 서해도의 유주(儒州) · 안악(安岳) · 장연(長淵) 등에 현령(縣令)보다 한층 낮은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파견하였으며, 인종 대, 명종 대까지 그 파견 지역이 늘어났다.

감무를 속군현에 설치한 목적은 유민을 정착시켜 국가에서 필요한 조세(租稅)역(役)을 효과적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꾀하는 데에도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주1이 많으므로 감무관으로 하여금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지게 하였으며, 감무를 파견하자 유민이 점차 돌아오고 산업이 나날이 번창하였다.

1108년(예종 3)에도 감무를 설치한 군현이 증가하여 예종 연간에 70여 곳의 속군현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이때의 감무는 송나라의 감당관(監當官) 제도를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직제상 감당관에 포함되는 송의 감무는 주2와 주세(酒稅)를 거두는 일을 감독하였다. 또한 철을 주조하는 일이나 유민을 주3하는 일을 맡았다.

예종 대에 감무를 설치한 군현 중에 철의 산지가 많은 것으로 보아 철의 생산을 관리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숙종 대에 이어 예종 즉위 초에 여진과 전쟁을 벌였던 고려가 감무를 설치함으로써 전쟁에 동원할 군역을 확보하고 필요한 물자를 동원하려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1143년(인종 21)에 개성부 강음현(江陰縣)과 양광도의 이천군(利川郡), 경상도의 헌양현(巘陽縣) · 송생현(松生縣), 전라도의 구례현(求禮縣) · 두원현(荳原縣) 등 8개 군현에 감무를 보냈다. 같은 시기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속현 중에 현령을 임명한 곳도 있었다. 이때 현령을 파견한 군현은 속현이 이속되는 데 비해 감무를 설치한 군현은 속현이 이속되지 않는 차이가 있었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감무를 대규모로 파견하였다. 1172년(명종 2)에 집정 무신인 이의방(李義方)의 형 이준의(李俊儀)가 53곳의 속현에 감무를 배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경상도 상주목의 속군인 개녕군(開寧郡) · 보령군(報令郡) · 함창군(咸昌郡) 등지와 전라도 나주목의 속군현인 무안군(務安郡) · 담양군(潭陽郡) · 곡성군(谷城郡) · 낙안군(樂安郡) · 남평군(南平郡) · 진원현(珍原縣), 양광도 청주목의 속군현인 연산군(燕山郡) · 목주(木州) · 연기현(燕岐縣) 등 50여 군현에 새로 감무가 설치되었다. 뒤이어 정중부가 집권하였던 1175년(명종 5)과 1176년(명종 6)에도 15군현에 감무를 배치하였다. 명종 때 전라도와 경상도의 속군현에 감무의 파견이 두드러졌다.

무신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무신이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감무제를 활용하였다. 무신 정권의 성립과 유지에 기여한 무신에게 관직을 제공한 측면이 있었다. 고려 전기에는 대체로 문반 관료가 감무로 임명된 반면, 무신정변 이후에는 감무와 같은 지방 관직에 무신이 진출하게 되었다.

감무는 1359년(공민왕 8)에 현령과 함께 주4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다가 창왕 때 감무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1389년(공양왕 1)에 개성부 소속의 덕수현(德水縣) · 임강현(臨江縣) · 임진현(臨津縣) · 마전현(麻田縣)과 교주도 횡천현(橫川縣) 등 5곳의 속현, 1390년(공양왕 2) 경상도의 수성군(壽城郡) · 안강현(安康縣) · 문경군(聞慶郡) 등을 비롯한 전국 28곳의 속군현이 설치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전라도 여양현(礪陽縣) · 운제현(雲梯縣) · 마령현(馬靈縣) 등 전국 8개 군현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이전과 달리 공양왕 때 감무가 배치된 군현에는 인근의 속현이나 부곡이 이속되는 경우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문경군에 감무를 배치하면서 가은현(加恩縣)을 소속시키고 청산현(靑山縣)에 감무를 파견하면서 주성부곡(酒城部曲)이 소속되었다.

또는 특정 군현에 파견된 감무가 인근 속현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수성군 감무는 해안현(解顏縣)의 관리를 겸하였다. 공양왕 대에 조선의 건국 세력이 정치개혁을 주도하면서 군현제 정비 작업의 하나로 새로 감무를 설치하였다.

고려 말에 왜구 침입으로 인하여 조세 수취가 불안정하고 지방사회가 혼란해지자 감무를 파견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경상도 속군현에 감무를 배치한 것이 두드러졌다. 경상도는 왜구의 피해가 심한 지역이었으므로 지방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러 군현에 감무를 배치하였다.

또한 중앙정부는 조운을 재개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지려는 목적에서 감무를 파견하는 군현을 늘렸던 것이다. 조선 건국세력은 새로 감무를 정함으로써 지방사회에서 지지 기반을 다지고 새 왕조를 개창하려 하였다.

임무와 직능

감무는 속군현에 파견되어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니는 지방민이 평안하고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하였다. 1106년(예종 1)에 유주 등에 파견된 감무는 떠도는 백성을 안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이 효과를 거두자 감무를 배치하는 속현을 늘리고, 1109년(예종 3)에 대대적으로 감무를 설치하였다. 이때부터 감무는 공식적인 지방 관직으로 정착하였다. 그 이전까지 현령이 설치된 지역에는 속현이 있었는데 비하여 감무가 배치된 지역에는 속현이 이속되지 않았다.

감무가 설치된 군현은 현령을 파견한 지역에 비해 군현의 인구나 영역 규모가 작으므로 보좌하는 예하 관원이 없었다. 최하급 지방관으로서 감무는 개별 군현에서 발생한 유민의 안집과 권농, 조세 수취, 향리 감독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감무로 임명된 인물을 보면 예종 대에는 광주(光州)에 양원준(梁元俊), 장연현(長淵縣)에 민영(閔瑛), 인의현(仁義縣)에 권정평(權正平) 등이 파견되었다. 명종 대에는 청도군(淸道郡)에 금의(琴儀), 송림현(松林縣)에 염극모(廉克髦), 황려현(黃驪縣)에 임익돈(任益惇) 등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음서 또는 과거를 통해 동정직을 받고 감무로 임용되었다. 감무는 지방 관인의 초사로 운영되었다. 고려 전기 과거급제자뿐만 아니라 음서 출신들이 지방 관직을 초사직으로 받았는데 감무도 그중 하나였다.

무신집권기에는 무신도 지방 관직에 임용되었다. 1204년(희종 즉위년) 장산현(章山縣)의 감무에 보임된 김중문(金仲文)도 무신 집안 출신이었다. 원간섭기에는 좌천으로 감무에 임명된 사례가 있고 여러 사(司)의 서리(胥吏)로 감무직에 나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1353년(공민왕 2)에 현령과 감무에는 주5 7품 이하의 과거급제자를 임용한다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는 현령 · 감무의 명칭을 안집별감이라 고치고 5품과 6품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1388년(창왕 즉위년)에 조준(趙浚)이 안집별감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다시 현령 · 감무로 되돌아 갔다. 이와 더불어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서리를 감무에 임용하지 말도록 하고 5~6품의 인재를 발탁하게 하였다.

변천사항

조선이 건국되고 1392년(태조 1)부터 계속하여 감무가 설치되는 군현이 증가하였다. 경상도 경주의 속현 청하현(淸河縣), 전라도 남원부의 속현 운봉현(雲峰縣) 등지에 감무가 주6되었다. 태조 대부터 태종 대에 걸쳐서 20여 현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이 시기에는 고려 말 공양왕 때처럼 속현을 이속하거나 두 속현을 병합하여 한 감무를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가 태종 때 군현제를 정비하면서 1414년(태종 13)에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개칭하였다.

의의 및 평가

고려 전기 지방의 군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현이 많았다. 예종 때부터 속군과 속현에 감무를 배치하고 인종 대와 명종 대를 거치면서 지방관이 관할하는 군현이 증가하였다. 고려에서는 감무를 파견하여 그 행정력을 점차 속군현에까지 널리 침투시켜 나갔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권정평묘지명(權正平墓誌銘)」
「김중문묘지명(金仲文墓誌銘)」
「민영묘지명(閔瑛墓誌銘)」
「염극모묘지명(廉克髦墓誌銘)」
「임익돈묘지명(任益惇墓誌銘)」

단행본

박종기, 『고려사 지리지 역주』(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6)
하현강, 『한국중세사연구』(일조각, 1988)
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 연구』(일조각, 1984)

논문

최은규, 「고려시대 감무의 운영과 그 특징: 임명 사례의 분석을 중심으로」(『역사와 현실』 118, 한국역사연구회, 2020)
신서영, 「공양왕대 ‘신정감무’의 정치적 성격: 고려시대 감무 파견의 추이와 양상을 중심으로」(전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김병인, 이바른, 「고려 명종대 감무 파견의 정치적 성격」(『한국중세사연구』 29, 한국중세사학회, 2010)
박종기, 「고려 말 왜구와 지방사회」(『한국중세사연구』 24, 한국중세사학회, 2008)
윤경진, 「고려 군현제의 구조와 운영」(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김병인, 「고려 예종대 감무의 설치배경」(『역사학연구』 8, 호남사학회, 1994)
이인재, 「고려 중후기 지방제 개혁과 감무」(『건축역사연구』 3,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1990)
김동수, 「고려 중 · 후기의 감무 파견」(『역사학연구』 3, 호남사학회, 1989)
나각순, 「고려시대의 감무에 대한 연구」(『민병하교수정년기념사학논총』, 1988)
원창애, 「고려 중 · 후기 감무증치와 지방제도의 변천」(『청계사학』 1, 한국학중앙연구원, 1984)
주석
주1

일정한 거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백성.    우리말샘

주2

조선 시대에 거두던 잡세의 하나. 장사하는 사람에게서 받던 세금이다.    우리말샘

주3

평안하고 화목하게 함.    우리말샘

주4

고려 공민왕 때에, 지방에 파견된 현령과 감무를 개칭하여 부른 이름.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서울에 있던 여러 관아의 벼슬을 통틀어 이르던 말. 지방에 있던 것으로 개성부와 각 능전(陵殿)의 벼슬 및 수원부, 개성부, 광주부, 강화부의 유수(留守)도 포함한다.    우리말샘

주6

시설 따위를 더 늘려서 설치함.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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