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의 집주는 국왕을 측근에서 수행하는 내시(內寺)로서, 왕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는 인물 중에서 임명되었다. 1116년(예종 11)에 정항(鄭沆)이 내시로서 집주가 되고, 인종 때 배경성(裵景誠)도 근시(近侍)로서 장주(掌奏), 즉 집주가 되었다.
집주를 역임한 인물은 훗날 대체로 승선(承宣) 직에 올랐다. 정항은 권지승선, 좌부승선 · 우승선 · 좌승선을 거쳐 지주사(知奏事)에 이르는 여러 승선직을 맡았다. 배경선도 뒤에 승선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140년(인종 18)에 낭사(郎舍)에서 간언한 것으로 인하여 인종이 집주관을 파직하였다.
의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집주를 임명하였다. 유석(庾碩)이 내시로서 장주사(掌奏事)가 되었는데 장주사는 곧 집주이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권이 성립하고, 집정 무신이나 그 혈족이 집주를 맡았다. 집정인 이고(李高)가 대장군 위위경(大將軍衛尉卿)으로 집주를 겸임하고 이의방(李義方)이 대장군(大將軍) 전중감(殿中監)으로 집주를 겸하였다.
1174년(명종 4)에는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李隣)이 집주에 임명되며 1197년(명종 27)에는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가 집주가 되었다. 최충수가 죽고 집주의 직을 폐지하였다가 충렬왕이 추밀원에 집주를 설치하였다. 집주는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는 시점에 복구되었다.
1274년(충렬왕 즉위년) 8월에 이분성(李汾成)이 추밀원 집주(樞密院執奏)로 임명되었다. 이분성은 임유무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고 원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국왕이 신임하는 내시를 집주로 삼던 고려 전기의 전통이 부활되어 국왕 측근이 집주로 임명되었다.
집주는 중추원 승선 외에 왕명을 출납하는 일을 맡은 관원이었다. 왕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하달되는 왕명을 받아 승선이나 명을 받는 관원에게 직접 전하는 기능을 하였다. 또한 재가를 받기 위해 승선을 거쳐 올라오는 백관의 장주(章奏: 신하가 임금에게 시정 등을 글로 아뢰는 것)를 집주가 왕에게 상달하는 왕명 출납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집주의 왕명 출납은 승선의 그것보다 좀 더 광범하였다.
충렬왕이 복구한 집주의 직은 오래지 않아서 사라졌다. 대신에 승선과 더불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사(辭)가 등장하였다. 사는 왕명을 전달하는 내료(內僚)로서, 집주의 기능을 이어받았다.